남이흥 장군 일가 유품 ( )

남이흥 장군 일가 유품
남이흥 장군 일가 유품
의생활
유물
국가유산
충청남도 당진시 모충관(慕忠館)에 소장되어 있는 남이흥 장군과 의령남씨(宜寧南成) 선 · 후대의 유품 41점.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남이흥장군 일가 유품(南以興將軍 一家 遺品)
분류
유물/생활공예/복식공예/의복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국가민속문화유산(1970년 12월 29일 지정)
소재지
충청남도 당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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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남이흥 장군 일가 유품은 충청남도 당진시 모충관에 소장되어 있는 남이흥 장군과 의령남씨 선·후대의 유품 41점이다. 남이흥(1576∼1627)은 병마절도사로 정묘호란 때 순절한 인물이다. ‘남이흥장군유품’은 1970년에 중요민속자료(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2004년에 남이흥 장군 일가의 유품들이 추가로 지정되었다. 1차로 지정된 유물은 녹피방령포와 녹피바지 등 총 8점이다. 추가로 지정된 복식류는 남이흥의 아버지 유물로 추정된다. 이 유품을 통해 조선 후기의 생활상을 알 수 있다. 특히 남이흥의 관복본 초상화는 무관의 사자흉배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목차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모충관(慕忠館)에 소장되어 있는 남이흥 장군과 의령남씨(宜寧南成) 선 · 후대의 유품 41점.
내용

남이흥은 27세 때 무과에 합격한 후, 49세에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진무(振武) 1등 공신이 되었으며, 52세에 병마절도사로 구성(龜城)에서 청병(淸兵)의 침입을 막다가 순절하였다. 남이흥 장군의 유품이 1970년에 중요민속자료(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으나 2004년 남이흥 장군의 선 · 후대에 걸친 전적류와 생활용품, 출토복식 등이 추가 지정됨에 따라 ‘남이흥장군유품’에서 ‘남이흥장군일가유품(南以興將軍一家遺品)’으로 국가유산명을 변경하였다.

유물은 1996년 당진시 대호지면 도이리에 건립된 남이흥 장군 유물전시관인 모충관에 전시 · 보관되어있다. 1차로 지정된 유물은 총8점으로 녹피방령포와 녹피바지, 답호 1점 그리고 상아 · 나무 · 녹각 등으로 만든 호패 6점이다. 추가 지정된 유물은 전적류 13점과 영정 1점, 생활용구 6점, 출토복식류 6점 등으로, 총26점이다. 추가 지정된 복식류는 답호 2점, 철릭 3점, 장옷 1점인데 남이흥 장군과 그의 아버지 남유(南瑜)의 묘를 광주에서 이장할 당시에 수습된 것으로, 옷의 형태가 임진왜란 이전의 특징을 보이므로 남유의 유물로 추정된다.

지정 당시 ‘구의(裘衣)’로 명명되었던 ‘녹피방령포(鹿皮方領袍)’는 사슴가죽으로 만든 이중방령깃의 대금형(對衿形) 장수(長袖) 포(袍)이다. 뒷길이 143㎝, 품 53㎝, 화장 120㎝, 진동 32㎝이며 곧은 배래의 통소매로 소매 끝에서 둥글려 수구는 24㎝이다. 겨드랑이 아래에는 밑넓이 28㎝인 사다리꼴 무와 한 변이 4.8㎝인 사각접음무가 달렸으며 깃 아래에서 섶 일부에 이중 바대가 곧게 연결되어있다. 방령의 너비는 8㎝이고, 깃 아래 섶 부분의 바대는 너비 7.9㎝, 길이 34.2㎝이다. 깃에는 매듭단추를 2개, 바대에는 매듭단추 3개를 달았다. 뒷 중심선 하단에는 86㎝의 뒤트임이 있으며 트임에는 매듭단추 4개를 달았던 흔적이 있다. 도련과 수구에는 백피(白皮)로 선을 둘렀던 흔적이 남아 있다.

녹피바지[鹿皮袴]는 사폭바지이다. 길이는 112.5㎝이고 허리둘레는 120㎝, 허리말기의 높이는 14.5㎝이다. 허리통 왼쪽의 이음선은 감침질로 바느질되었고, 이음선 위쪽에는 고리가 달려 있다. 허리와 바지 부리는 굵은 명주실로 박음질되어 있다.

소색 보문단(寶紋緞)의 답호[搭胡]는 이괄의 난을 평정하고 돌아온 장군에게 인조(仁祖)가 직접 벗어 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정 당시에는 ‘대례복[團領]’이라고 명명하였으나 1991년에 ‘답호’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훼손되었던 것을 현재 바탕천을 대어 보존처리한 상태이다. 안감은 거의 소실되어 깃 아래와 도련 끝에서 안감으로 사용되었던 갈색의 명주 조각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뒷 길이는 122㎝, 화장은 19㎝, 진동 31.5㎝, 품은 41.8㎝이다. 옷의 형태는 소매와 섶이 없는 대금형이고 양옆과 뒤 모두 트임이 없으며 길의 좌우에는 커다란 사다리꼴 무가 달리고 겨드랑이에 삼각형 무를 대었다 둥근 목선에는 정사선 방향으로 재단한 둥근 깃을 세워 달았고 앞에는 자주색의 매듭단추를 달았다. 매듭단추는 흉배 하단에도 달렸던 흔적이 있어 11.5㎝ 간격으로 모두 5개를 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앞뒤 길 바탕에 직접 수를 놓아 만든 4조룡(四爪龍)의 방형(方形) 흉배가 장식되어 있는데 크기는 가로 35.5㎝, 세로 38.5㎝이다.

출토복식은 답호 2점과 철릭 3점, 장옷[長衣] 1점이다. 출토된 답호는 전형적인 조선 전기의 답호이다. 인조가 하사하였다고 하는 소색의 답호와는 형태가 전혀 다르다. 조선 전기의 답호란 반소매가 달린 포(袍)로, 양 옆에 커다란 무가 달려있다. 추가 지정된 답호 2점은 겉과 안을 명주로 만든 겹옷이다. 답호는 앞길이 114㎝, 뒷길이 117㎝인 전단후장(前短後長) 형태이다. 깃은 너비가 14㎝의 칼깃이며 넓은 동정이 달려있다. 진동과 수구는 43㎝로 곧은 배래선의 통소매며 소매길이는 25㎝이다. 겉섶은 두 조각으로 구성된 이중섶이며 짧은 고름(2.5×27㎝)의 2쌍이 달려 있다.

철릭은 3점이 출토되었다. 철릭은 상의와 하상이 연결된 포제로 평상복이나 융복, 단령의 받침옷으로 사용되었다. 1점은 명주 겹철릭으로, 상의와 하의 모두 60㎝로 1:1 비율이며 품은 68㎝이고 소매는 좌우 모두 탈착식으로 제작되었는데, 짧은 소매 길이는 18㎝이고 분리된 긴 소매는 67㎝이다. 진동은 40㎝, 수구 31㎝이다. 깃은 칼깃이며 깃 너비는 13.5㎝이다. 앞단과 밑단은 두 땀 상침으로 둘러져있다. 운보문단의 고름바대에 2쌍의 고름을 단 흔적이 남아있다. 두 번째 철릭 역시 명주 겹철릭인데, 길이는 109㎝(상의 51㎝, 하의 58㎝), 화장 54㎝, 품 68㎝, 진동 40㎝이며 이중칼깃에 4㎝ 너비의 동정이 달려 있다. 소매는 좌우 모두 탈착식인데 긴 소매는 소실되었다. 운보문단(雲寶紋緞) 고름바대에 자색 명주 고름(2×26㎝)을 2쌍 달았다. 세 번째 철릭 역시 명주 겹철릭이다. 좌우 탈착식 소매인데 긴 소매는 모두 소실되었다. 총길이 108㎝(상의 51㎝, 하의 57㎝), 소매 길이 20㎝, 진동 41㎝, 수구는 46㎝이다. 너비 14㎝의 이중칼깃이 달렸다. 화문단(花紋緞) 고름바대에 자주색 짧은 고름(2.5×22㎝) 2쌍이 달렸다.

장옷은 조선시대 여성들의 대표적인 포 종류이다. 출토된 장옷 1점은 고운 명주의 겹옷으로 한지 심을 사용하였다. 뒷 길이는 128.5㎝, 앞 길이는 132㎝이다. 좌우 모두 섶 안으로 들여 달린 목판깃으로 깃 너비는 12㎝이며 동정은 확인되지 않는다. 겉섶과 안섶 모두 두 조각으로 구성된 이중섶이다. 소매는 곧은 배래선의 통소매로 길이는 60㎝이며 소매 끝부분의 26㎝는 다른 색의 옷감으로 끝동을 달았다. 겨드랑이에는 5.5㎝ 크기의 사각접음무가 달려 있다. 겉고름(2×20㎝)은 달려있으나 안고름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 외에 1602년 급제교지(及第敎旨) 1매, 1622·1626·1627·1630년 교서(敎書) 4매, 1625년 진무공신교서(振武功臣敎書) 1매, 1627년 추증교지(追贈敎旨) 1매, 1579·1582·1624년 별급문기(別給文記) 3매, 1599·1608년 화회문기(和會文記) 2매, 1636년 허여문기(許與文記) 1매 등의 전적류가 있으며, 남이흥 장군의 관복본 영정 1점, 생활용구인 단서함, 지휘봉, 화살통[矢服]과 활집[弓袋], 남여藍輿), 요여(腰輿) 등이 있다.

의의와 평가

의령남씨 충장공파 대종중에서 소장하여 온 다양한 유품을 통하여 조선후기의 생활상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특히 남이흥 장군의 관복본 초상화는 후대에 이모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래도 17세기 관복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고 무관(武官)의 사자흉배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 외에 녹피 복식류라든가 활과 관련된 시복과 궁대 등은 무관의 생활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문화재대관 중요민속자료2-복식자수편-』(문화재청, 2006)
「조선시대 무관의 길짐승흉배제도와 실제」(이은주, 『복식』58-5,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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