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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휴학(同盟休學)

사회구조개념용어

 학생들이 교육 또는 정치적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수단으로 벌이는 집단적인 등교·수업 거부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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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명동맹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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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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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용어
시대
근대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학생들이 교육 또는 정치적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수단으로 벌이는 집단적인 등교·수업 거부 운동.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근대 교육 제도하의 학생들은 인간애·자유·평등의 가치를 지향하였고, 근대적 대중교육 초창기에는 일반 국민보다 지적 수준이 높을 뿐 아니라 선구자적 사명감을 가졌다.
그러므로 학교 당국의 비교육적 처사와 사회·국가·민족적 불의에 민감하게 대응하며, 그를 통하여 일반 대중을 각성시켜 대규모 운동 단계로 확대시키려는 학생운동이 빈번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동맹휴학은 시위와 더불어 학생운동 중 가장 급진적인 집단행동의 하나로, 학생 상호간의 연대를 통한 투쟁이다. 동맹휴학은 학교를 넘어서 사회적 차원까지 학생들 항의를 확산시킬 수 있으므로 효과가 클 뿐아니라 동시에 그 제재조치를 약화·무력화할 수 있는 상호 보장적인 안전장치 기능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집단행동인 학생운동이 가능한 결정적 조건은 학생들이 공유하는 신분적·사회적 성격의 동질성을 들 수 있다. 가치지향적 태도 외에도 신체적·정신적 성장 과정과 경제적·사회적 책임의 유예, 신분적·계급적 출신 등의 조건에서 동질성이 강하면 강할수록 학생운동은 치열해질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가치와 계급의 분화에 의하여 이러한 동질성이 상실되었으며, 일반인이 전통적으로 갖는 학생에 대한 인식과 학생들 스스로 지니는 사명감이 약화되고, 또한 학생운동에 대한 정부와 학교 당국의 통제가 가중됨에 따라 동맹휴학은 소멸하였다고 할 수 있다. 1960년 이후 학생운동이 상대적으로 활발해짐으로써 동맹휴학보다 시위가 전형적인 방법이 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역사적 배경
동맹휴학의 역사는 조선시대 성균관 유생의 권당(捲堂)에서부터 찾을 수 있지만, 특히 일제강점기에 들어와서 항일 민족운동의 대표적인 방법으로 동맹휴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1920년대 한국학생들은 일제 식민지라는 특수한 환경 하에서 3·1운동 후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에 대항해서 또는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다방면의 학생운동을 전개했다.
동맹휴학은 학원내의 사소한 문제로부터 발단이 되어 일제 식민지 노예교육에 대한 규탄, 나아가 총독부 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확대·발전하고 결국 민족독립을 부르짖는 민족운동의 성격으로 천착되어 한 학교, 한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한국인의 교육문제, 전 민족의 문제로 나타났던 것이다.
특히 일제 식민지 교육의 본질은 식민지배의 공고화와 합리화에 있었기에, 일제는 우리 민족의 인격과 고유 문화를 무시하고, 식민노예적 교육 제도와 교육관으로 일관했다. 따라서 일본인 교사와 학생 가운데는 한국인에 대한 우월감과 지배욕에 사로잡혀 교실 안에서 민족 감정을 무시하고 차별 대우하고 모욕적인 언행을 일삼은 자들이 많았다. 또한 그로 인하여 말썽이 일어났을 때, 일제 헌병·경찰·관리는 일본인을 무조건 옹호하고 조선 학생만 처벌하는 일이 예사였기에 조선 학생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일제강점기의 동맹휴학은 본질적인 면에서 항일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식민지 상황을 누구보다도 철저히 인식하여 그에 대한 민족적 대항 자세를 확립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집단체였다. 따라서 학생들의 항일동맹휴학은 자유와 조국을 찾으려는 민족의식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제의 교육을 받더라도 민족적 활로는 물론이고 개인적인 미래 전망조차 불투명하였으므로 학생들은 더욱 거세게 투쟁하였다. 전민족적으로 일치단결하여 전개하였던 3·1운동 이후부터는 동맹휴학이 자주 일어났다.
일제의 통계에 따르면 1921년 33건, 1922년 52건, 1923년 57건 등 점차 증가하여, 1928년 83건, 1929년 78건, 1930년 107건, 1931년 102건으로 최고봉에 달하였다가 1934년 39건, 1935년 36건으로 감소하였다.
일제측 분류에 의한 동맹휴학의 원인은 ① 학교 시설·교규·교칙·학과배정 등에 기인하는 맹휴, ② 교사 배척에 관한 맹휴, ③ 지방 문제에 관한 맹휴, ④ 기타의 학교 내부 및 학생 상호 간의 일에 관련된 맹휴, ⑤ 민족의식 및 사회주의 사상의 발현 등에 기인한 맹휴 등으로 나누어진다.
1926년 6·10학생운동 이전의 동맹휴학은 학교당국 나아가 식민지교육에 대한 불만을 이유로 하여 일어난 것이 주류였다.
3·1운동 이후 학생들이 일제에 과감하게 저항했던 민족운동인 6·10학생운동 이후에 각종 학교들이 일으킨 동맹휴학 때 내건 요구조건, 진정서, 결의사항 등을 종합 분석하면 ① 노예교육의 철폐 ② 조선역사의 교수 ③ 교내에서의 조선어 사용 ④ 학생회의 자치 허용 ⑤ 언론·집회의 자유 등이었다. 물론 이 시기에 교사배척이라던가 시설확장의 요구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보다도 한 학교, 한 개인 상대의 동맹휴학보다는 식민지교육 나아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고 민족독립을 성취하기 위한 방편으로 동맹휴학의 성격이 변하였다.
동맹휴학의 변화를 좀더 살펴보면, 초기에는 사립학교에서 동맹휴학이 많이 일어났는데 그 주된 이유는 학교설비 개선과 교사 배척을 요구하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동맹휴학이 비록 학교 내부의 지엽적인 문제에서 발단되었으나, 식민지교육 제도의 시정과 민족독립의 요구로 발전되어 갔던 예가 많았다.
공립학교는 사립학교와 같은 문제는 별로 없었으나, 일본인 교사와 학생이 다수였기 때문에 그들의 조선 학생에 대한 차별은 쉽게 실감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민족문제가 공립학교 동맹휴학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학생들의 항일 의식도 점차 민족자치나 자결주의에서 벗어나 사회주의 사상에 고무되었다.
특히 그러한 배경을 가진 동맹휴학은 1927년에 증가되어 1929년에는 정점에 달하였다. 학생들은 비밀 회의와 비밀 조직을 통하여 민족정신과 항일 정신을 배양하였고, 기숙사도 좋은 학습장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조직이 동맹휴학을 주도하는 형세를 보이게 되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을 정점으로 학생운동은 일제의 강화된 탄압으로 점차 위축되었고 동맹휴학도 감소되었다.
교육·문화의 중심지인 서울은 동맹휴학이 가장 격심하게 일어난 곳이다. 1927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현재의 교육방법은 조선혼을 양성하지 않고, 일본 압박 하에 일본신민이 되는 교육’이라는 이유로 11월 11일 동맹휴학에 돌입하였다. 2학년과 4학년 학생들은 학교당국에 조선 역사·조선어 등의 교육 철저, 기숙사 수리, 일본인 교사 배척, 학우회 창설 등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하고 퇴교하였다. 서로 강경히 맞서다가 주모자가 경찰에 구속되고 130명이 무기정학에 처하여지자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다. 학생들은 무기정학의 부당성과 조선 역사 수업 요청의 정당함을 밝히는 항의서를 학교에 제출하였고, 이후 학교 당국은 31명을 퇴학 처분하였다. 이러한 대립과 보복은 교우회의 중재 노력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다가 겨울방학이 시작되면서 냉각기가 되었다. 다음해 1월 개학일이 되어도 동맹휴학 학생들이 등교하지 않았으므로 학교 당국은 어쩔 수 없이 무기정학 학생 301명에게 등교통지서를 발부할 수밖에 없었다.
1927년 2월 27일에 일어난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淑明女子高等普通學校)의 동맹휴학 역시 격심했다. 사립학교인 이 학교의 운영 주도권을 일본인들이 장악하여 독주하는 것을 배제시키고, 한국인 본위 교육과 이를 위한 새로운 교육 편제를 요구하며 민족의식을 부각시켜 나간 것이다.
학생 400명은 사감 등 수명의 일본인 교사 면직, 학생 대우 개선, 조선인 교원 채용 증가 등을 요구 조건으로 내걸고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학교 당국은 강경한 자세로 이에 대응하여 학생과 학부형회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사태를 지켜보던 근우회(槿友會)는 6월 11일 회의를 열고 현덕신(玄德信) 등을 조사위원으로 선출하여 동맹휴학 문제를 조사하기로 하고, 신흥청년동맹(新興靑年同盟)도 역시 심은숙(沈恩淑) 등을 조사위원으로 선출하였다. 이처럼 사회단체에서 동맹휴학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학생의 휴학이 민족적 차원에서 볼 때 정당한 것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또한 동일재단인 양정·진명·숙명 3교의 졸업생 대표 약 30명이 6월 27일 3교연합 교우회로서 양명회(養明會)를 발기하고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의 동맹휴학 문제를 토의하기 위한 추진위원회를 조직하였으나, 경찰의 금지로 무산되고 말았다.
8월 20일 학교의 통지로 등교한 학생들은 교무 주임 사이토의 사퇴를 관철하기 위하여 교내 항쟁을 하던 중 기숙사 무단퇴사 등을 이유로 35명의 학생이 정학 처분을 받았고, 전교생들은 다시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또한 한국인 교사들도 학생 처벌에 항의하여 사표를 제출하였고, 숙녀회와 학부형회, 양명회도 항의를 하였다. 결국 사이토는 사표를 제출하였고, 9월 27일경 학교는 정상화되었다.
1923년 6월에 동맹휴학을 한 바 있던 중앙고등보통학교(中央高等普通學校)는 1927년에 보다 대대적인 동맹휴학을 전개하였다. 교장의 전제적 학교 행정을 반대하고 수명의 교사를 배척할 것을 요구 조건으로 내걸었으나, 본질적 동기는 항일 민족정신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11월 5일 학생들은 교정에 모여 학교 고별식을 거행하였고, 11월 14일 개학하고자 하였으나 강경파 학생 100여 명이 개학을 거부하면서 등교 방해 등 실력행사를 하였기 때문에 정·사복경찰관이 동원되어 134명을 검거하여 종로경찰서에서 취조하였다.
결국 강몽우(姜夢寓)·남치선(南致善) 등 5명과 피신 중이던 조용규(趙容奎)·손창주(孫昌周) 등이 경찰에 의하여 출판물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이들의 동맹휴학 이유는 지엽적인 교내 문제가 아니라, 일제의 교육 제도와 그것을 그대로 표방하는 교장의 전제를 반대하는 데 있었다.
또한 당시 동경에 있던 한국인의 사상단체인 신흥과학연구회(新興科學硏究會)에서는 1927년 10월 10일자로 ‘중앙고보의 맹휴에 대하여 엄정한 사회적 비판을 환기함’이라는 동정격문을 작성하여 국내에 발송하였다.
그 격문에서는 중앙고등보통학교의 동맹휴학의 이유로서 식민지 차별교육에 대한 불만, 학교 당국의 전제에 대한 반항, 학생 요구조건 무시에 대한 불만, 학생인격 유린에 대한 항쟁 등을 지적하고, 학생본위의 교육, 학생자치권 등을 주장하였다.
이상의 학교들 외에도 경신학교(儆新學校)·배재고등보통학교(培材高等普通學校)·휘문고등보통학교(徽文高等普通學校)·경성여자상업학교 등에서 강경한 동맹휴학이 전개되었다.
서울 지역의 동맹휴학은 전국의 지방 학교에 끼치는 영향이 컸다. 지방 학생들은 서울이라는 중앙의 학생계가 선택하는 행동 노선에 민감하였을 뿐만 아니라 항일 학생운동의 가능성을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각 지방별로 함경도의 함흥농업학교 동맹휴학(1927),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고등보통학교의 동맹휴학(1927), 전라북도전주고등보통학교의 동맹휴학(1926), 경상북도대구고등보통학교의 동맹휴학(1926, 1928), 경상남도부산제2상업학교 동맹휴학(1928) 등 주요한 동맹휴학이 일어났었다. 특히 1928년 7월 6일 오전 8시진주고등보통학교와 진주농업학교에서는 동시에 ① 조일공학제(朝日共學制)를 폐지 ② 노예적 교육을 철폐 ③ 조선어 시간을 연장 ④ 조선역사 및 조선어를 교수 ⑤ 교내 언론집회의 자유 보장 등의 요구 조건을 제시하고 동맹휴학에 들어 갔다. 이는 지금까지 각 단위학교에서 분산적으로 감행했던 동맹휴학의 단계에서 넘어서 동일지역의 학교가 연합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는 데 의의가 매우 크다.
나아가 일제 식민지교육 체제와 민족 차별에 저항하는 동맹휴학은 어린 보통학교 학생까지 확산되었다. 1921년부터 1928년까지 모두 192건의 보통학교 동맹휴학이 있었다.
이후 동맹휴학은 미군정기에도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1946년 8월 22일에 「국립서울대학교 종합안」, 「국대안」이 법령으로 공포되자 약 1년에 걸쳐 전국적으로 57개교, 참가 학생 4만여 명에 이르는 동맹휴학이 일어났다. 이 동맹휴학이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것이었다.
학생들 주장은 국대안 철회, 미국인 대학총장을 한국인으로 교체, 문교부 책임자 인책, 경찰의 학원 간섭 배제 등이었는데, 저변에는 단순한 학원 문제가 아니라 광복된 우리 나라의 민주주의와 민족주의 문제가 흐르고 있었다.
학생들의 국대안 반대운동에 교수와 언론은 적극적으로 호응한 반면, 문교부·경무부·검찰부·우익 학생은 주동자와 참가 학생에 대한 비난·체포·제명·퇴학 등으로 대처하였다.
결국 1947년 6월에 서울대학교 미국인 총장이 물러나고 1∼2개 대학을 제외한 대부분의 대학은 미등록·제명 학생들을 원칙적으로 복교시키기로 하면서 동맹휴학은 끝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1,000여 명의 학생과 380여 명의 교수는 복교와 복직이 불가능하였다.
이후에 남한만의 단일총선거·단일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동맹휴학도 일어났지만, 1948년 정부수립 이후 학생운동은 약화되었고, 동맹휴학도 사라졌다. 1950년대는 학생운동의 암흑기였다. 다만 1957년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생들이 대통령 양자인 이강석(李康石)의 입학을 반대하는 동맹휴학을 하였고, 홍익대학교 학생들이 부실한 재단을 성토하는 동맹휴학을 하였을 뿐이다.
1960년 이후 학생운동 양상은 시위로 발전하였다. 동맹휴학이 일어나기 어려운 조건이었을 뿐 아니라 시위가 보다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학교 당국이나 정부도 학생운동 저지를 위해 휴교와 휴업을 빈번히 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동맹휴학이 서울대학교와 고려대학교에서 1965년에 일어난 것을 제외하면 발생 사례를 발견할 수가 없다.
영역닫기영역열기결과
동맹휴학은 한국학생들의 항일학생운동이 가장 활발하던 1920년대에 제일 많이 일어났다. 일제 측 통계자료에 의하면 1921년부터 1928년까지 동맹휴학 건수는 404건으로 집계되었다. 이를 학교별로 보면 관공립초등학교 156건, 관공립중등학교 79건, 관공립전문학교 7건, 사립초등학교 36건, 사립중등학교 121건, 사립전문학교 5건으로 나타났다. 이 중 학교 수에 비하여 동맹휴학 수가 가장 많은 것은 사립중등학교로, 이 시기의 동맹휴학을 이끌었던 것은 이들 학교라고 볼 수 있다. 404건의 동맹휴학을 도별로 보면 경기 77건, 충북 17건, 충남 20건, 전북 29건, 전남 28건, 경북 14건, 경남 38건, 황해 42건, 평남 20건, 평북 24건, 강원 29건, 함남 51건, 함북 15건으로 서울을 포함한 경기도에서 가장 많이 동맹휴학이 일어났다.
전국 어느 곳을 막론하고 학교가 있는 지역에서 동맹휴학이 계속 일어나자 일제당국은 탄압을 가중시켜 나갔다. 일제 고등경찰은 한국 학생운동의 기본성격을 일반적 사회현상 속에서 식민지 노예교육을 반대하고 민족적 본능의 발로에서 나온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규정하여 적극적 제지에 나섰던 것이다.
일단 동맹휴학이 일어나면 학생들에게 무자비한 처벌이 가해지는 것이 상례였다. 학교당국자, 총독부 학무국, 경찰은 1차적으로 정학, 무기정학, 퇴학처분을 내리고 2차적으로는 구속, 기소, 형사처벌까지 서슴없이 단행하였다. 이 시기 한국학생은 각종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하는 수보다 퇴학하는 수가 많았는데, 경제적 이유뿐 아니라 동맹휴학에 연루되어 퇴학당하는 수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였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1921년부터 1928년까지 동맹휴학으로 처벌 받은 학생수가 7,674명으로 1년 평균 959명이나 되었다. 이 중 완전히 학교를 다니지 못하게 된 퇴학자가 1,560명, 정학이 4,758명이나 되었고 재판을 받아 영어의 몸이 된 자가 172명, 검속 당한 자가 319명이나 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의의와 평가
동맹휴학의 전개 및 결과를 살펴보면 일제강점기 학생들이 일제에 얼마나 격렬히 저항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물론 견해에 따라서는 동맹휴학이 만세시위나 폭력적 투쟁보다 소극적인 항일방식으로 오해되기 쉬우나 학생 입장에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투쟁방식이었다.
학생들은 민족과 국민의 고난을 철저히 인식하고, 해결방안을 진지하게 모색하며, 구속·퇴학·정학·체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동맹휴학으로 일치단결하여 일제에 저항한 것이다. 동맹휴학은 민족사에 영원히 남아 평가받게 될 학생 운동으로, 젊은 세대의 항일독립운동이며 민족·민주운동이라 할 수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해방 후 한국학생운동사  (이재오, 형성사, 1984)

  • 『항일학생민족운동사연구(抗日學生民族運動史硏究)』 ( 정세현 ,일지사,1975)

  • 『항일학생사(抗日學生史)』 ( 양동환 ,청파출판사,1956)

  • 「1920년대 동맹휴학의 실태와 성격」 ( 김성은 ,『여성과역사』14,2011)

  • 「광주학생운동 이전 동맹휴학의 성격」 ( 김기주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한국독립운동사연구』35,2010)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정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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