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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순(朴齊純)

근대사인물

 문관·고위관료·정치가·친일반민족행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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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명박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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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문관·고위관료·정치가·친일반민족행위자.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1858년 12월 7일 경기도용인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반남(潘南), 호는 평재(平齋)이고 참정 박홍수(朴洪壽)의 아들이다. 조선 말기에 성균관 대사성, 호조참판, 이조참판, 농상공부대신 등을 역임하였다. 대한제국기에는 외부대신, 육군 참장, 의정부 참정대신, 내부대신 등을 지냈으며, ‘을사오적’으로 지탄을 받았다. 일제강점기에는 자작의 작위를 받았으며, 중추원 고문, 이문회(以文會) 회장, 가정박람회(家庭博覽會) 명예고문 등으로 활동하였다. 1916년 6월 20일 사망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생애 및 활동사항
1883년(고종 20) 별시문과에 합격했다. 급제한 뒤 1883년 4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主事)를 시작으로 10월 주차 텐진종사관[駐箚天津從事官], 1884년 1월 기연해방군사마(畿沿海防軍司馬), 3월 주차 텐진독리통상사무 종사관에 임명되었다. 1885년 3월 홍문관 부교리, 5월 사헌부 장령, 1886년 1월 주텐진대원, 2월 주차 텐진통상사무를 역임하고 4월에 귀국했다. 같은 해 7월 승지로 임명되면서 다시 텐진으로 부임하여 1887년 6월까지 근무했다.
1887년 7월 텐진에서 귀국한 뒤 11월까지 이조참의, 성균관대사성, 참의내무부사, 경주부윤에 임명되었다. 1888년 5월 인천항 통상사무 감리, 1889년 3월 전환국 총판이 되었다. 1890년 1월 내무부 협판으로 영국·독일·이탈리아·러시아 주재공사에 임명되었으나 현지에 부임하지 않았다. 1890년 10월 형조참판, 12월 공조참판, 1891년 1월 한성부좌윤, 3월 형조참판, 6월 성균관대사성, 9월 한성부우윤을 거쳐 10월 호조참판에 임명되었다. 1892년 7월 예조참판, 8월 형조참판, 1893년 3월 호조참판을 지냈다.
1893년 3월 11일 동학교도들이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내세운 보은집회가 날로 세가 확산되자 같은 달 25일 고종의 밀명을 받아 위안 스카이[袁世凱]와 청나라 군대의 파병문제를 협의한 바 있다. 같은 해 7월 이조참판, 8월 여주목사를 거쳤다. 1894년 4월 장흥부사로 임명되면서 보외시행사(補外施行使)를 겸했고, 6월 전라도관찰사, 7월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했다. 충청도관찰사로 재임 중 관군 및 일본군과 연합해 공주에서 동학농민군 진압에 앞장섰다. 1895년 10월 중앙관계로 돌아와 제용원 태복사장(太僕司長)에 임명되고, 11월 외부협판이 되어 3차 김홍집 내각에 기용되었다.
아관파천 직후인 1896년 2월 중추원 1등 의관으로 승진했다. 같은 해 8월 외부협판으로 외부대신 서리를 맡았다가 10월 외부대신, 11월 농상공부대신, 외부대신을 맡았다. 1905년 9월까지 수차례 외부대신을 역임했다. 1899년 1월 청국의약전권대신(淸國議約全權大臣)으로 한청조약, 간도행정관리권 교섭, 경흥·의주 개방 단행과 같은 주요한 외교교섭을 주도했다. 같은 해 6월 궁내부철도용달회사 사장을 맡았고, 10월 외부대신으로 비서원경, 장례원 장례를 겸했다.
1900년 1월 법규교정소 의정관, 3월 직조학교(織組學校) 교장, 12월 형법교정 총재도 겸하면서 육군 참장에 임명되었다. 1900년 3월 거제도협약을 맺었고, 1901년 3월 벨기에와 수호통상조약, 4월 일본과 소총 및 탄약매입계약을 체결했다. 같은 해 8월 만한교환설(滿韓交換說)이 대두되자 한일제휴를 상주(上奏)하였다. 그해 10월 의정부 찬정에 임명되었다. 11월 특명전권공사를 겸하면서 만한교환설에 대한 일본 정부의 의향을 탐지하고 한일동맹, 망명자문제, 재정원조 등을 타진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나 일본 정부가 수여하는 일본국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았다.
1902년 1월과 3월 주청전권공사(駐淸全權公使)에 임명된 후 일본과 청국에 삼국동맹을 제안했다. 하지만 간도문제를 둘러싼 한청 양국의 의견대립과 일본의 반대로 성립되지 않았다. 1904년 1월 귀국해서 외부대신으로 임명되었고 4월부터 11월까지 원수부 회계국 총장, 법부대신, 관제이정소(官制釐正所) 의정관을 역임했다. 1905년 3월 농상공부대신, 6월 학부대신, 7월 농상공부대신을 맡았다. 농상공부대신으로 재임하던 8월 일본의 강압으로 체결된 「한국연해 및 내하(內河) 항행에 관한 약정서」에 반대하며 사직소를 올렸다. 9월 평안남도관찰사로 임명되었다가 10일 후 외부대신으로 다시 입각했다. 같은 해 10월 국민교육회에 찬성금을 기부했다. 러일전쟁 후 일본이 추진하는 한국에 대한 보호조약에 대해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과 함께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하지만 결국 11월 일본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와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을사오적’으로 지탄받았다.
을사조약 체결 후 의정부 참정대신으로 친일내각수반이 되었다. 1907년 1월 친일보부상단체인 동아개진교육회(東亞開進敎育會) 찬성장을 맡았다. 그해 대한자강회 등 단체와 『황성신문(皇城新聞)』 등의 언론이 내각을 비판하고, 을사오적암살단사건이 일어나자 5월 내각 총사퇴를 했다. 사퇴하자 바로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1908년 5월 대한여자흥학회 고문, 6월 한자통일회(漢字統一會) 발기인, 8월 관진방회(觀鎭坊會) 회장, 기호흥학회 찬무부 주무원, 10월 일본적십자사 특별사원, 12월 기호흥학회 특별찬성원에 위촉되었다. 그해 9월 일본에서 조선과 타이완 식민화를 촉진하기 위해 조직된 동양협회(東洋協會)에 100원을 기부했다.
1909년 2월 내부대신으로 재입각하고, 12월에는 임시서리 내각총리대신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2월 대동학우공제회 찬성원, 7월 한묵사(翰墨社) 특별찬성장으로 참여했다. 그해 11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장례식에 맞춰 장충단에서 관민추도회를 발의했고,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송덕비건의소(頌德碑建議所) 찬성원을 맡았다.
1910년 4월 이완용, 조중응(趙重應) 등의 주도로 한일합방 찬성운동을 벌이는 정우회(政友會)에 후원금 금화 200환을 기부했다. 같은 해 6월 총리대신 서리로 경찰권을 일본에 이양하는 각서(「한국경찰사무 위탁에 관한 각서」)를 체결했고, 8월에는 내부대신으로 ‘합병조약’ 체결에 참석해 가결함으로서 ‘경술국적’으로 지탄을 받았다.
국권피탈에 앞장선 대가로 병합 직후인 1910년 10월 일본 정부에서 자작 작위를 받았고 조선총독 자문기구인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중추원 고문으로 1916년 죽을 때까지 해마다 1,6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10년 10월 23일부터 11월 16일까지 조선총독부가 비용 전액을 후원한 ‘조선귀족일본관광단’ 일행으로 일본 각지를 방문했고, 천황 생일인 천장절(天長節) 연회에 초청받아 주병(酒甁)을 받았다. 귀국 후 「귀족단 일행의 귀래(歸來)-박제순 자(작)의 담(談)」(『매일신보(每日申報)』1910.11.18.)에서 천황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같은 해 12월 귀족은행 설립을 추진했다.
1911년 1월 은사공채 10만원을 받았다. 같은 달 구관(舊慣)을 조사하여 조선의 통치자료로 제공하기 위해 조선구관연구회 조직을 추진했다. 7월 경학원 대제학에 임명되었고, 10월 조선귀족대표로 도쿄에 가서 천장절에 참석했다. 1912년 1월 이문회(以文會) 회장, 같은 해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15년 1월 조선총독부의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5월 특별유공회원으로 250원을 기부하였으며, 8월 가정박람회(家庭博覽會) 명예고문으로 위촉되었다. 같은 해 11월 다이쇼[大正] 천황 즉위대례식에 참석한 후 그 소감을 「즉위 대례식 헌송문(獻頌文)」(『경학원잡지(經學院雜紙)』1915.12)으로 발표했다. 11월 처 서씨와 함께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서예에 능했다.
박제순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6·7·9·13·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7: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137∼153)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유영익
개정 (2016년)
이은희(연세대학교 역사와공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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