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박해는 네 차례에 걸쳐 파동으로 전개되었다. 첫번째는 1866년 봄에, 두번째는 1866년 여름에서 가을까지, 세번째는 1868년, 네번째는 1871년으로 이어져 도합 8,000여 명 이상의 순교자를 내었다.
1868년의 세번째를 무진사옥, 1871년의 네번째를 신미사옥이라고 부르기도 하나 대원군에 의해 계속 추진된 것이므로 병인박해에 포함시키는 것이 통례이다. 따라서 병인박해는 병인년(丙寅年)인 1866년 한 해의 박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뒤 6년간에 걸친 박해를 모두 지칭하는 용어이다.
대원군은 원래 천주교에 대해 묵시적으로 이해를 지녔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천주교 박해령을 선포하고 장기간에 걸쳐 박해를 강행하게 된 데에는 서양세력의 침략적 접근에 따른 국가적 위기 의식과 정치적 반대세력의 비난에서 벗어나 정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방책이 숨어 있었다.
즉 1858년 6월 애로우호사건(Arow號事件)에 따라 톈진조약(天津條約)이 맺어지고 러시아가 연해주 지방을 차지하게 되면서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과 러시아는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그 뒤 러시아는 자주 두만강을 건너와 통상을 요구하게 되는데, 대원군을 비롯한 정부고관들은 이에 당황하였고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이 때 김면호(金勉浩)·홍봉주(洪鳳周) 등의 천주교도들이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아책(防俄策)을 건의하여 대원군의 정치적 관심을 끌게 되었다.
승지(承旨) 벼슬을 지낸 남종삼(南鍾三)은 대원군에게 한불조약을 체결하여 나폴레옹 3세의 위력을 이용하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보다 구체화시키기 위해 조선에 체류하고 있는 주교 베르뇌(Berneux, 張敬一)와 만나볼 것을 건의하였다.
대원군은 만약 러시아를 물리칠 수 있다면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겠다는 암시를 주어 천주교도들은 매우 기뻐하였으나 지방에 가 있던 베르뇌와 주교 다블뤼(Daveluy, 安敦伊)가 서울에 도착한 것은 한 달이 지나서였고 대원군의 처지는 급격하게 바뀌어 있었다.
그 이유는 우선 1866년 1월에 도착된 북경사신의 편지에서 영불연합군의 북경함락 이후 시작되었던 양인살육(洋人殺戮)의 사실이 보고되었다는 점에 있다.
청나라의 천주교 탄압의 소식은 반 대원군 세력으로 하여금 천주교와 접촉하고 있는 대원군에게 정치적인 공세를 취하게 하였고, 이에 대원군은 정치적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쇄국양이와 사교금압의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더구나 운현궁(雲峴宮)에도 천주교가 침투했다는 소문이 퍼져 조대비(趙大妃)까지 천주교를 비난하기에 이르자 대원군은 천주교 탄압을 결심하고 박해령을 선포하였다.
1866년 2월베르뇌를 선두로 홍봉주·남종삼·김면호는 물론 정의배(丁義培)·전장운(全長雲)·최형(崔炯) 등 대표적 교인들과 다른 수천명의 교인들이 서울 및 그 밖의 지역에서 잡혀 순교하였다. 이 때 베르뇌·다블뤼 등 9명의 프랑스 신부도 체포되어 서울 새남터와 충청남도 보령의 갈매못에서 순교하였다.
이렇게 박해가 치열해지자 피신해 있던 신부 리델(Ridel, 李福明)은 7월 조선을 탈출, 청나라의 톈진으로 가서 프랑스 동양함대 사령관 로즈(Roze,P.G.)에게 구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에 로즈는 10월에 7척의 군함을 이끌고 프랑스 선교사들의 학살 책임을 묻는 무력시위를 벌이게 되어 병인양요(丙寅洋擾)가 발생하였다.
이 병인양요로 말미암아 박해는 제2단계에 들어가게 되는데, 대원군은 국가적 위기의식을 고조시키면서 천주교도를 통외초구(通外招寇)의 무리로 내세워 수많은 천주교인을 처형하였다. 이 때 대원군은 양이의 발자국으로 더럽혀진 땅은 그들과 통하는 무리의 피로 씻어내야 한다고 주장하여 처형지는 주로 서울과 해안지방으로 정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박해는 1868년 4월에 일어난 오페르트(Oppert)의 충청남도 덕산 남연군묘(南延君墓) 도굴사건을 계기로 다시 불이 붙어 내포지방을 중심으로 대량 학살이 일어났다. 오페르트는 수차에 걸친 통상요구가 거듭 거부되자 대원군 아버지의 분묘를 도굴할 계획을 세우고 작업을 펴나갔으나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이에 대원군은 크게 분노하여 내포 지방의 교인들을 대대적으로 색출하였다. 내포지방은 천주교회 창설기부터 천주교가 유포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많은 희생자를 내었고 부근의 지방까지 피해를 입었다. 그 뒤 1871년의 신미양요(辛未洋擾)로 다시 박해가 가중되었다.
신미양요는 1866년 평양시민의 공격으로 침몰된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의 사건을 미국이 정치적으로 이용, 조선에 포함외교(砲艦外交)를 펴고자 하면서 시작되었다.
미국함대의 강화도 공격을 시발로 하여 6일간의 전투 끝에 결국 미국은 물러가게 되었고, 격퇴에 성공한 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국민에게 철저한 쇄국양이의 국시를 선명히 하는 한편 잔존해 있는 천주교인을 색출하여 처형시켰다. 그 뒤에도 탄압이 계속되다가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하자 병인박해가 마무리되었다.
우리나라 최대의 박해이고 가장 많은 순교자를 낸 병인박해는 천주교의 박멸이라는 국내 정치적 측면만이 아니라 급격하게 밀어닥치는 서구 식민세력에 대한 대항이었다는 점에서 1801년의 신유박해나 1839년의 기해박해와는 다르다.
병인박해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천주교는 1886년 한불조약 이후 다시 회복하게 되었으며, 1968년에는 병인박해 기간중에 순교한 24명이 복자(福者)로, 1984년에는 성인(聖人)으로 오르게 되었다.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기록은 1890년 주교 뮈텔(Mutel, 閔德孝)이 자료를 모아 간행한 『치명일기』가 대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