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세 나라가 정립(鼎立)하였던 한국사의 한 시기를 의미한다. 남북국시대, 후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처럼 한국사 속의 주요 국가를 중심으로 한 시대 구분 용어의 하나로 사용되고 있다.
현전 역사서 중에서 삼국을 하나의 시대로 구분한 것은 고려 전기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의 『 삼국사기(三國史記)』(1145)가 가장 이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통해 고려보다 앞선 왕조를 삼국으로 제시하고, 그의 역사를 기전체(紀傳體)의 형식으로 정리하였다.
신라와 고구려 그리고 백제의 왕조사를 각기의 본기(本紀)로 구성하였고, 그의 문물과 인물을 각각 지(志)와 열전(列傳)으로 서술하였다. 『삼국사기』는 고려 이전의 왕조를 삼국으로 파악하였다. 이와 같은 이해는 이른바 『 구삼국사(舊三國史)』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삼국사기』 편찬 이전부터 마련되어 있었고, 이는 신라의 삼한일통(三韓一統), 즉 삼국통일 의식에서 시작되었다고 보이는데, 후대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고려 후기의 일연(一然, 1206~1289)은 『 삼국유사(三國遺事)』를 편찬하면서 고조선(왕검조선), 위만조선, 북부여, 동부여, 가야 등 삼국 이외 여러 나라의 역사를 포함하였고, 왕력편(王曆篇)에서 삼국뿐만 아니라 가락국(駕洛國), 즉 가야의 왕계(王系)까지 수록하였다. 다만, 기이편(紀異篇)에서 드러나듯 신라의 제왕(諸王)을 중심으로 하였고, 삼한(三韓)과 삼국을 중심으로 한 왕조의 계보와 그 역사를 중시하였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 등이 편찬한 『 동국통감(東國通鑑)』(1484)을 비롯해서 조선 시기에 편찬된 여러 역사서 역시 그러하였다. 정통을 설정하는 데서 차이를 보이기도 하였지만, 대체로 고조선과 삼한에서 삼국으로 이어지는 왕조의 계보를 중시하였고, 삼국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였다.
이는 개화기 역사 교과서 이후 근대 역사학의 형식과 방법으로 편찬된 20세기 전반의 여러 역사서에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하였기에 비록 직접적으로 삼국시대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어도, 삼국의 건국에서 신라의 통일까지가 하나의 시기로서 구분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삼국시대가 시대 구분의 용어로서 엄밀히 정의된 것은 아니었다.
본격적인 시대 구분 논의는 일제 시기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 수용되면서부터 전개되었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영향을 받아 한국사의 보편적인 발전 과정이 탐구되었고, 이를 염두에 두고 한국사 속에서 고대 · 중세 · 근대 등의 시대를 구분해 보려고 한 것이다. 백남운(白南雲, 1894~1979)의 『 조선사회경제사(朝鮮社會經濟史)』(1933)가 대표적이다. 백남운은 고대 노예제 국가로서 고구려 · 백제 · 신라의 삼국을 제시하였고, 통일신라에서 중세 봉건제 국가가 형성되었다고 하였다. 삼국시대를 고대사의 시대 구분 속에 위치시킨 것이다.
백남운의 시대 구분과 삼국시대사 이해는 여러 학자로부터 비판받기도 하였지만, 이후의 논의에 중요한 토대를 제공하였다. 고대 · 중세 · 근대 등의 시대 구분이 한국사 연구의 중요한 과제로 부각된 것이다. 여기서 고대는 사회 발전에 따라 성립된 시대의 하나로, 원시 사회의 해체와 이를 바탕으로 형성된 국가를 핵심적인 지표로 하였다. 8 · 15광복 이후 한국과 북한의 한국사 연구 역시 이와 같은 이해의 연장선상에서 고대 국가의 형성을 해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때 국가는 학자마다 다양하게 정의되었지만, 적어도 일정한 범위 내에서 권력이 지속적으로 행사될 수 있어야 한다는 데 큰 이견이 없다. 이에 일찍부터 주목한 것이 세습 왕권과 관료 제도였다. 현재 한국의 역사학계에서 삼국이 고대 국가를 형성한 시점에 대해서는 대략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대체로 1세기 고구려의 태조대왕(太祖大王), 3세기 백제의 고이왕(古爾王), 4세기 신라의 나물마립간(奈勿麻立干) 재위기를 전후해서 삼국이 고대 국가를 형성하였다고 본다. 이러한 고대 국가는 중앙집권적 영역 국가의 체제를 갖추면서 완비되었다고 이해하는데, 4세기 고구려의 소수림왕(小獸林王), 4세기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 6세기 신라의 법흥왕(法興王) 재위기가 바로 그러한 시점으로, 율령(律令)의 반포가 고대 국가의 완비를 의미한다는 관점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한국 고대사 속의 여러 나라 중에서 고대 국가의 체제를 완비하는 데까지 나아간 것은 삼국이었다. 따라서 4~6세기 삼국의 중앙집권적 영역 국가 체제 완비는 한국 고대사의 발전 과정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이해에 따르면 고대 국가를 완비하기 이전의 역사는 그 이후의 역사와 구분된다. 따라서 삼국시대란 하나의 시대 구분 속에 포함시켜 보기가 어렵다.
고고학 분야의 경우 서기전 1세기에서 서기 3세기까지를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라고 한다. 초기 철기시대에 해당하는데, 철기가 보급되어 널리 사용된 4세기 이후의 삼국시대와 구분해서 별도의 시대를 설정한 것이다. 서기전 1세기~서기 3세기의 고구려와 부여, 옥저와 동예, 그리고 삼한의 여러 나라가 원삼국시대에 해당한다.
고고학 연구만 아니라 문헌 사료를 통해 보아도 서기전 1세기~서기 3세기는 삼국시대라고 말하기에 어려운 점이 있다. 비록 『삼국사기』에서는 삼국의 시조(始祖)가 왕조를 개창하며 곧 급격히 영역을 확장하였고 국가의 제반 제도를 갖추어간 것처럼 서술하고 있지만, 이는 후대의 윤색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후한서(後漢書)』와 『삼국지』를 비롯해 동시기 중국 측의 역사서를 보면 3세기까지 삼국은 주변의 여러 나라를 압도하지 못하였다. 백제와 신라의 경우 아직 삼한의 여러 작은 나라 중 하나에 불과하였다. 3세기까지 삼국이 정립되었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다.
이처럼 고고학과 역사학 방면의 연구를 종합해 보면 삼국은 4세기 이후 정립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현재 삼국시대라고 하면 대체로 4세기 이후부터 신라의 삼국통일까지를 의미한다. 그러나 다수와 다른 이해와 설명 역시 상당하였다.
일부 학자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그대로 믿어 삼국의 국초부터 고대 국가를 형성하였다고 보는데, 이 경우 삼국시대의 범위는 국초를 포괄한다. 또한, 일부 학자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비판적으로 보지만, 삼국의 고대 국가 형성에 주목하고 삼국시대를 전기와 후기 등으로 구분함으로써 보다 이른 시기부터 삼국시대의 범위 속에서 설명하기도 한다.
이상과 같이 현재 삼국시대란 용어는 한국 고대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서로 달리 사용되고 있다. 삼국이 고대 국가의 체제를 완비해 간 4세기 이후부터 신라의 삼국통일까지를 의미하는 것이 다수이지만, 삼국의 국가 형성부터 삼국시대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한편 가야의 역사에 주목해 삼국시대가 아닌 사국시대(四國時代)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적어도 4~6세기 가야는 삼국에 못지않은 고대의 주요 국가 중 하나였으므로, 그를 포함해 사국시대란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대의 중국 정사에서 삼국이 중시되었고, 특히 『구당서(舊唐書)』를 비롯한 이후 중국 측의 역사서에서 삼국이 하나의 지역적 · 역사적 단위로 묶여졌으며, 전통시대 역사 인식에서 삼국이 강조되었다는 점에서 여전히 삼국시대란 용어가 더 널리 사용되고 있다.
서기전 15~10세기 청동기시대 이후 만주와 한반도 지역에서는 여러 나라가 국가를 형성하였다. 고조선과 부여가 대표적이다. 청동기시대의 여러 나라는 서기전 4세기 이후 철기를 수용하여 한층 발전하였는데, 서기전 108년 고조선의 멸망 이후 한사군(漢四郡)과 대립하고 교류하며 각지에서 국가 형성이 연이었다.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국가를 형성한 것은 고구려였다.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의 산간지대에서 국가를 형성하였다. 국가 형성의 기초는 5부(部)였다. 『삼국지』 동이전(東夷傳)에는 고구려에 계루부(桂婁部)와 소노부(消奴部), 절노부(絶奴部), 관노부(灌奴部), 순노부(順奴部) 등의 5부(部)가 있었다고 하였다. 이 중에서 소노부 이하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의 비류부(沸流部), 연나부(椽那部), 관나부(貫那部), 환나부(桓那部)와 대응된다.
노(奴)와 나(那)는 각 지역의 정치집단을 의미하는데, 천(川)을 중심으로 형성된 집단이란 뜻이다. 5부는 서기전 4세기 이후 압록강 중류의 여러 정치집단이 통합하고 연맹하였던 결과로, 5부 또는 5나부 중심의 국가체제는 1~2세기 태조대왕 대를 전후해서 정비되었다. 이 무렵 계루부의 고씨(高氏) 왕권이 확립되었고 왕권이 대외적인 교역권과 군사권을 장악하였다.
또한, 『삼국지』 동이전을 보면 삼한(三韓)의 여러 나라가 보이는데, 이 중에서 마한(馬韓)의 여러 나라 중 하나로 백제국(伯濟國)과 진한(辰韓)의 여러 나라 중 하나로 사로국(斯盧國)이 확인된다. 마한의 백제국과 진한의 사로국이 바로 백제와 신라의 모체였다. 백제와 신라 역시 5부 또는 6부를 중심으로 국가를 형성하였는데, 백제는 한강을 중심으로 하였고 신라는 낙동강 동쪽을 중심으로 하였다.
백제는 3세기 중반 낙랑군(樂浪郡) · 대방군(帶方郡)과 마한의 일부 세력이 충돌하는 과정 속에서 국가적인 성장을 거두었다. 이른바 기리영(崎離營) 전투가 대표적인 사건의 하나였다. 고이왕 대 무렵이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아도 고이왕 대 백제에서 각종 관제를 정비한 것으로 나오는데, 비록 모두 고이왕 대의 사실로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그때 국가체제의 정비가 일단락된 사정을 반영한다고 이해하고 있다.
신라의 국가체제 정비가 일단락된 시점으로는 4세기 후반 나물마립간(奈勿麻立干)이 주목되고 있다. 마립간(麻立干)의 칭호는 기존의 이사금(尼師今)을 대신한 것으로, 높은 곳의 간(干)이란 뜻으로, 왕권의 성장을 반영한 것이었다고 파악된다. 나물마립간 이후 박(朴) · 석(昔) · 김(金)의 삼성(三姓)이 교대로 왕위에 오르던 현상이 없어지고 김씨가 왕위를 독점적으로 세습하였다.
삼국은 3~6세기 철기의 보급과 생산력의 발전을 바탕으로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정비하면서 성장하였다. 삼국의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의 정비를 주도한 것은 국왕이었다. 고구려는 2세기 후반 고국천왕(故國川王) 대에 이르러 왕권이 한층 강화되었고 중앙집권화가 더욱 진전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고국천왕 대를 전후해서 전통적인 5부 · 5나부가 점차 소멸되고, 동 · 서 · 남 · 북의 방위명부(方位名部)가 새롭게 등장해 정착되어 간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방위명부는 왕도(王都) · 왕기(王畿) 내지 계루부 지역에 설정되었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2세기 후반~3세기를 통해 종래 5부 · 5나부의 지배층이었던 제가(諸加) 중 일부는 방위명부 지역으로 이주해 중앙의 귀족으로 재편되었고, 그들은 고구려의 왕권 아래의 관등 또는 관직을 수여받고 국가 운영과 정치를 주도하였다. 그러므로 방위명부의 등장은 고구려의 왕권이 강화되고, 중앙집권화가 진전된 모습을 보여 준다고 이해된다.
또한, 2세기 후반~3세기에는 왕위 계승이 형제 상속에서 부자 상속의 방식으로 정착되었다. 이러한 왕위 계승 방식의 변화는 왕권이 보다 강화되었음을 말해 준다. 이와 관련되는 것이 연나부 출신의 왕비를 맞이하는 관례가 생겨난 것이다. 이것은 왕권에 대항하는 여러 세력을 억제하기 위하여 왕실이 연나부 세력과 결탁한 것으로 해석된다. 왕권의 강화를 말해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왕권의 강화와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의 정비를 바탕으로 고구려는 서쪽으로 요동 방면으로, 남쪽으로 대동강 방면으로 영역 확장을 도모하였다. 보다 활발한 움직임은 4세기부터 본격화되었다.
4세기 전반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는 급격히 변동하고 있었다. 중원 지역의 서진(西晉, 265∼316) 왕조가 쇠락하고 있었고, 북방의 유목지대에서 활동하였던 흉노(匈奴) · 갈(羯) · 선비(鮮卑) · 저(氐) · 강(羌) 등의 여러 종족이 흥기하였다.
유목지대의 여러 종족이 중원 지역의 북부로 남하하여 각기 왕조국가를 수립하였다. 이른바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304∼439)의 개막이었다. 이 중에서 서진 왕조의 쇠락은 고구려의 국가적 성장에 좋은 기회였다. 고구려는 313년 · 314년 서진의 낙랑군 · 대방군을 공격하였고, 대동강 유역을 차지하였다.
고구려의 낙랑 · 대방 지역 진출은 국가적 성장에 중요한 토대를 제공하였다. 낙랑 · 대방의 인적 · 물적 자원을 획득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발해 · 황해를 통해 동아시아 국제무대에 진출할 수 있었다. 압록강 서쪽의 요동 지역으로 영역의 확장 또한 도모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한편으로 서쪽의 모용선비(慕容鮮卑) 전연(前燕)과 남쪽의 백제와 대립하였다.
백제가 국가체제를 완성하게 된 것은 4세기 중반 근초고왕(近肖古王) 대의 일이었다. 이때부터 백제에서도 부자 상속의 왕위 계승이 정착되었고, 진씨(眞氏)를 왕비로 맞아 이른바 진씨 왕비 시대가 개막되었다. 근초고왕 대에는 박사(博士) 고흥(高興)을 얻어 『 서기(書記)』를 편찬하였는데, 이와 같은 역사서의 편찬은 강화된 왕권과 국가의 면모를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근초고왕 대에는 대외적인 영역 확장 또한 활발하였다. 근초고왕은 남방의 마한 세력을 제압하였고 북방의 고구려와 대립하며 그의 남진을 저지하였다. 평양성을 공격해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도 하였다. 이로써 근초고왕 대에는 지금의 경기도 · 충청도 · 전라도 지역 및 황해도 · 강원도 일부 지역을 차지할 수 있었는데, 서쪽으로 동진(東晉)과 교섭하고 남쪽으로 왜(倭)와 교섭하며 국제적인 지위를 확고히 한 백제의 융성기였다.
고구려는 이와 같은 백제의 융성기에 그와 대립하며 고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서쪽으로 모용선비 전연과 대립하며 큰 타격을 받기도 하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고구려는 국가체제 정비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소수림왕이 큰 성과를 거두었다. 소수림왕은 372년 불교를 수용하고 태학(太學)을 설립하였으며, 373년 율령(律令)을 반포하였다. 모두 중앙집권적 국가체제 정비와 밀접한 조치였다. 특히 율령은 종래 각 지역의 정치집단에서 사용하던 관습적인 법을 일원적인 성문법 체계로 재편하였던 것으로 짐작되고 있는데, 그러한 점에서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완비한 상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고구려와 백제와 비교해 신라의 국가적인 성장은 늦은 편이었다. 나물마립간 대 김씨 왕권을 확립한 데 이어 5세기 전 · 중반 눌지마립간 대에 왕위 계승의 방식을 부자 상속의 제도로 정착시킨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5세기 후반 자비마립간 · 소지마랍간 재위 기간을 통해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진전시키기 위한 여러 조치를 취하였다. 사방에 우역(郵驛)을 설치하였고, 서울에 시사(市肆)를 열어 사방의 물품과 재화를 유통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신라의 국가적 성장은 대외적으로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것과 궤를 같이하였다.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에 보이듯 4세기 후반 신라는 백제와 왜(倭)의 공격을 받아 국가적인 위기에 처하였는데, 이러한 때에 고구려의 군사적인 도움을 받아 위기를 극복하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고구려의 정치적 · 군사적 통제 아래에 놓였다.
5세기 중반까지 고구려의 군대가 신라의 영토 내에 주둔하였고, 신라의 왕족이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졌다. 내정(內政) 간섭도 받았다. 그러다 눌지마립간 대 이후부터 백제와 연합해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였고, 그와 동시에 위와 같은 국가체제 정비에 나섰다.
이어 6세기 전반 지증왕(智證王) 대에는 우경(牛耕)이 시작되었고 수리시설이 개발되었다. 이를 통해 농업 생산력의 발전을 거둘 수 있었는데, 정치적인 변화를 추구하였다. 신라(新羅)란 국호를 채택하였으며, 중국식의 왕호를 채택하였다. 박씨가 왕비족으로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신라의 국가체제가 완비된 것은 6세기 전반 법흥왕(法興王) 대였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520년 반포된 율령이었다. 고구려 율령 반포의 의미와 같이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의 완비를 함의한다고 여겨진다. 법흥왕 대 신라는 536년 건원(建元)이란 연호를 사용하였다. 대외적으로 신라의 독립성을 선언한 조치였다. 뿐만 아니라 527년 또는 535년 불교를 수용하였다.
고구려와 신라의 불교 수용은 율령의 반포와 시기를 같이하였다. 이는 불교의 수용이 단순히 새로운 종교 내지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그 의미가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중앙집권적 국가체제 정비와 궤를 같이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비단 고구려와 신라만 아니라 4~6세기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그러하였는데, 불교는 국왕을 중심으로 사상적인 통일을 이루어 내는 데 기능하였고, 불교를 매개로 한 각종 문물을 수용하는 데 핵심적인 통로와 같았다.
이와 관련하여 백제의 사례가 상기된다. 백제의 경우 율령의 반포 시점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4세기 후반 침류왕 원년(384) 불교를 수용하였다고 전한다. 따라서 백제 역시 4세기 후반을 전후해서, 대체로 융성기를 구가하였던 근초고왕 · 근구수왕 무렵에는 율령이 반포되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삼국은 율령 반포를 통해 국왕과 중앙의 귀족을 중심으로 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하였고, 지방의 민에 대한 부세(賦稅) 체제를 효과적으로 운용할 수 있었다. 왕도의 지배층만 아니라 많은 수의 지방민을 군인으로 동원할 수 있었고, 대규모의 군대를 유지할 수 있었다. 무기와 무장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었고, 군량을 보급할 수 있었다. 대내적으로 정치와 사회가 안정된 가운데 군사력이 강화되었다.
삼국 간의 항쟁은 고구려와 백제의 대립에서 시작하였다. 4세기 후반 백제는 예성강 너머 지금의 황해도 남부까지 세력을 확대하였다. 이로써 고구려와 백제는 황해도 일대를 두고 경쟁하였다. 근초고왕은 371년 평양성 공격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그러나 고국원왕의 전사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평양성을 잃지 않았고, 양국의 충돌은 더욱 격화되었다.
4세기 후반 이후부터 고구려와 백제의 대립에서는 고구려의 군사적 우위가 확고한 모습이었다. 396년 고구려는 백제의 58성(城) 700촌(村)을 획득하였고, 한성(漢城)을 포위하였다. 백제 조정은 굴복하고 양국은 화친을 맺었다. 그러나 곧이어 백제는 왜와 연계하여 고구려에 대항하였고, 신라를 압박하였다.
400년 고구려의 5만 명이 신라에 파병되어 왜와 가야군을 격파하고 낙동강 유역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백제는 한강 이북 지역에 대규모 공세를 감행했지만 고구려에 의해 격파되었다. 4세기 전반을 거치는 동안 백제는 고구려의 군사적 우위를 넘어서지 못하였다. 백제는 한강 하류의 북쪽 지역과 북한강 · 남한강 상류 지역을 상실하였다. 427년 고구려의 평양 천도 이후 고구려의 압박은 더욱 강화되었고, 백제의 위기의식은 고조되었다.
백제의 개로왕(蓋鹵王, 재위: 455~475)은 서방의 북위(北魏) 및 북방의 물길(勿吉)과 연합해서 고구려를 견제하고자 하였고, 고구려를 상대로 북진을 도모하였다. 고구려의 동맹국이었던 신라도 긴장하였다. 이제 고구려와 신라의 동맹이 동요하였고, 신라는 백제와 화친하고자 하였다. 이른바 나제동맹이 체결된 것이다.
비록 나제동맹의 체결 시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평양 천도 이후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가 소원해졌고, 백제와 신라의 관계가 우호적으로 변모하였다는 데에는 대부분이 동의하고 있다. 454년부터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어 6세기 중반까지 고구려와 나제동맹의 군사적 대립이 지속되었다.
비록 나제동맹이 고구려의 남진에 맞섰다고 하지만, 5세기 전성기를 맞은 고구려를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5~6세기 중반 동아시아에서는 절대적인 강국이 없었다. 북위를 비롯한 북조(北朝)의 여러 나라가 가장 강성하였지만, 남조(南朝)의 여러 나라[송(宋) · 제(齊) · 양(梁) · 진(陳)]를 압도하지는 못하였다.
4세기 후반6세기 중반 북방 유목지대의 유연(柔然)과 47세기 전반 서방 유목지대의 토욕혼[吐谷渾]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강국이었다. 다수의 강국이 병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아시아의 주요 강국은 다원적인 국제질서를 형성하였고, 이 속에서 역관계(力關係)의 균형을 추구하였다. 고구려는 이와 같은 동아시아의 다원적 국제질서 속에서 여러 강국 가운데 하나로 인정받고 있었고, 동북아시아 지역 내에서 패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5세기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이와 같았으므로, 고구려는 더욱 적극적으로 남진을 추진할 수 있었다. 475년( 장수왕 63) 9월 장수왕은 직접 3만 명의 군대를 지휘해서 백제를 공격하였고, 백제의 도성 한성을 함락하였다. 백제의 개로왕을 사로잡아 아차산 아래에서 처형하였다.
고구려가 백제의 한성을 함락함에 따라 본격적인 한강 유역 경영이 시작되었다. 고구려의 한강 유역 경영은 6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적어도 장수왕의 뒤를 이어 그의 손자 문자명왕(文咨明王, 491519)이 재위하였을 때까지 고구려의 전성기는 지속되었다. 그런데 문자명왕의 사후 그의 두 아들 안장왕(安臧王, 재위: 519531)과 안원왕(安原王, 재위: 531~545)이 재위하며 정치적인 안정이 동요하였다.
이와 같은 모습은 『일본서기(日本書紀)』를 통해 살필 수 있는데, 『일본서기』에서는 531년 3월에 “고구려에서 그 왕 안(安)을 시해하였다.”고 하였다. 안장왕이 피살된 것으로 나오는 것이다. 『일본서기』에서 박국(狛國)은 ‘이리의 나라’라는 뜻으로서 백제 측에서 고구려를 낮추어 부른 표현이었다. 향강상왕(香岡上王)은 안원왕을 가리킨다. 이에 따르면 고구려에서는 안원왕의 죽음에 즈음해서 왕위 계승 분쟁이 있었고, 이로 인해 수천 명의 규모의 무력 충돌이 있었다. 6세기 전반 연이어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정변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와 같은 6세기 전반의 왕위 계승 분쟁은 고구려의 평양계(平壤界) 귀족 세력과 국내성계(國內城界) 귀족 세력의 충돌이었다고 파악한다. 고구려 귀족사회 내부에 분열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6세기 중반 고구려는 대외적으로도 위기 상황이었다. 유목지대의 돌궐(突厥)이 연을 대신해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하며 고구려 서방의 위협으로 등장하였다.
이처럼 대내외적으로 불안정한 정세가 지속되었던 시기에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이 북상하였다. 551년 백제가 먼저 한강 하류 지역을 공격하고 이어서 신라가 상류 지역을 공격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하류 지역의 6군을 백제에게 빼앗기고, 상류지역의 10군을 신라에게 빼앗겼다.
고구려의 정세는 6세기 후반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이 재위하며 안정을 되찾았다. 평원왕은 한강 유역을 수복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는 『삼국사기』의 온달전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589년 수(隋)가 중원 지역을 장악하고 동아시아의 최강국으로 부상하면서 고구려의 남진 정책은 지속되기 어려웠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까지 한강 유역은 삼국의 각축장으로 부단한 변화의 한가운데에 놓였다.
5~6세기 중반 동아시아에서는 주요 강국이 병립하였다. 중원 지역은 북조(北朝)와 남조(南朝)로 나뉘어 여러 왕조가 흥망성쇠를 거듭하였다. 북방에는 유연, 서방에는 토욕혼이란 유목국가가 흥성하였다. 그리고 동북방에 고구려가 또 하나의 강국으로 자리하였다. 이렇듯 다원적인 국제질서 속에서 고구려는 오랜 기간 동북아시아의 패권국(覇權國)으로 전성하였다.
동아시아 국제 정세의 변화는 6세기 중반부터 시작되었다. 동아시아의 북방에서 유연을 대신해 돌궐이 신흥 강국으로 등장하면서 고구려의 서방 변경을 위협하였고, 남방에서는 백제 · 신라의 연합군이 북진해 온 것이다. 그러나 이때 고구려는 귀족세력의 내분으로 인해 양면으로부터 몰려온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웠다. 결국 남방의 한강 유역을 상실했는데, 대신 서방 변경의 안정은 유지할 수 있었다.
6세기 후반부터는 서방 변경의 정세 역시 변화하였다. 581년 수립된 수(隋) 왕조는 589년 진(陳) 왕조를 병합하고 중원 지역을 통일하였고, 돌궐을 제압하면서 동아시아 최강국으로 부상하였다. 수의 국력이 동아시아 여러 나라를 압도하였고 다원적인 국제질서가 재편되었다. 그 여파는 동북아시아 지역까지 미쳤다. 고구려 서방 변경의 요서(遼西) 지역까지 수의 세력이 침투하였고, 거란(契丹) · 말갈(靺鞨) 등 고구려에 신속(臣屬)되어 있었던 여러 종족집단이 동요하였다.
고구려의 긴장감은 높아졌다. 군사체제를 정비하고 군량을 축적하기 시작하였다. 수에 첩자를 보내 쇠뇌 제작 기술을 입수하는 등 신무기를 개발하였고, 변경에서 발생한 국지적인 분쟁에 단호히 대처하였다. 더 이상 수의 세력이 동북아시아 지역까지 확대되지 못하도록 견제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동아시아 최강국으로 부상한 수의 태도는 고압적이었다.
598년 고구려는 수의 요서 지역을 공격해 수를 견제하고자 하였고, 수는 즉각 30만의 대군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598년 수의 고구려 공격은 실패하였다. 장마와 태풍으로 교통로가 차단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수는 고구려 공격을 포기하지 않았고, 612년과 613년 · 614년의 대규모 전쟁을 추진하였다.
612~614년 고구려와 수의 전쟁은 고구려가 수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종결되었다. 그런데 이 전쟁은 양국만 아니라 삼국 간의 국제관계와 무관할 수 없었다. 백제와 신라는 수의 동향에 예의주시하면서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였다. 다만 고구려와 수의 전쟁이 삼국 항쟁에 결정적인 변화를 초래하지는 못하였다. 보다 직접적인 관계는 고구려와 당의 전쟁에서 촉발되었다.
618년 건국한 당(唐)은 620년대를 거치면서 동아시아 최고의 강국으로 부상하였고, 차츰 고구려를 압박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642년 고구려의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정변을 통해 집권하였다. 비단 고구려만 아니라 백제와 신라에서도 정치적 변화가 있었다. 641년 즉위한 백제의 의자왕은 정변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였고, 신라를 압박하였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압박에 맞서 당과 교섭하면서 위기를 넘어서고자 하였다.
645년 당 태종은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고구려는 요동 지역의 주요 성을 상실하였고, 이른바 주필산(駐蹕山) 전투에서 대패하였다. 그러나 안시성에서 강력히 저항함으로써 당의 공세를 막아냈다. 당 태종은 결국 철군하였다. 640년대 후반에도 당은 지속적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고구려와 당의 전쟁이 전개되며 백제는 표면적으로 당의 고구려 공격을 지원한다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참전하지 않고 관망하였다. 신라는 당에 호응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이에 백제는 신라의 북진을 틈타 신라의 서부를 공격하였고, 신라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였다.
신라의 김춘추(金春秋)는 다각도로 외교적 교섭을 시도하였고, 마침내 648년 당과 군사 동맹을 체결하였다. 이제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신라-당의 동맹 대 고구려와 백제-왜의 연합이 대치하는 형국이었다. 비단 삼국과 왜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주요 세력이 대부분 어느 한쪽에 가담하였다. 동아시아 국제전으로 확대될 가능성을 내재하였던 것이다.
660년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협공해 백제의 수도를 함락시켰다. 이어 신라와 당은 고구려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때에 연개소문이 사망하였고, 그의 아들 남생(南生) 등이 권력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남생 형제는 반목하였고 형제의 대립은 국가적인 내분으로 전개되었다. 고구려는 내분으로 저항력이 약화되었고, 신라와 당의 공세는 지속되었다.
668년 마침내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의 평양성이 함락되었다. 비록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운동이 이어졌고, 신라와 당의 갈등이 잠재되어 있었지만, 이로써 삼국시대는 종결되었다. 고구려와 수 · 당의 전쟁 그리고 삼국 간의 전쟁은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중앙집권성을 강화하였고, 교통의 발달을 동반하였다. 이로써 동아시아 국제관계망을 확대하였다.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은 이와 같은 역사적 변화의 결과였다. 중앙집권의 강화가 내재한 모순과 국제관계망의 확대가 가져온 국제적 갈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결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는 지속되었다. 고구려의 멸망 이후 동아시아의 주요 국가는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를 한층 정비하였다. 신라와 발해, 그리고 일본은 당제(唐制)를 수용해 각국의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 정비에 활용하였다. 그리고 한자에 기초한 각종 문물을 공유하며 한층 보편적인 문명세계를 지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