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성여(聖與). 신영석(申永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원(申湲)이고, 아버지는 신정미(申廷美)이다. 어머니는 학성군(鶴城君) 이련(李連)의 딸이다. 큰아버지 신순미(申順美)에게 입양되었다.
1564년(명종 19) 생원시에 합격했고, 같은 해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문한관(文翰官)을 거쳐, 1569년(선조 2) 정언(正言)이 되었다.
장령(掌令)·수찬·사간·교리·부교리·부응교 등을 번갈아 역임하면서 경연관(經筵官)으로 입시하여 기묘사화 때에 피화된 인물들의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회복시킴)에 노력하였다.
1578년(선조 11) 집의(執義)가 되어 야인의 침입에 대비한 국방 강화를 건의하는 등 대간으로서 많은 활동을 전개하였다. 1584년(선조 17) 충청도·경기도 감목관(監牧官)이 되어 마정(馬政)을 순시하고 수령을 규찰하였다.
이 때 전라도 전세선(田稅船)이 안흥량(安興梁)에서 일이 빈번하여 세곡과 인명 손실이 막대함을 알고, 이의 시정을 위하여 항로의 개척과 주위에 창고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여 왕의 허락을 받았다.
그 뒤 의주목사·강원감사 등을 거쳐, 1592년(선조 25)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연경(燕京)에 체류하다 임진왜란의 발발을 알게 되었다.
이에 명나라의 병부상서 석성(石星)의 도움을 받아 병부와 예부에 계속 아뢰어 위급함을 호소하였다. 그 결과 부총병(副摠兵) 조승훈(祖承訓), 유격장(遊擊將) 사유(史儒) 등에 의한 요동병(遼東兵) 3,000명의 파견이 있게 되었다.
곧 귀환하여 승지·부호군·동지중추부사·병조참의·호조참의·형조참판·형조판서·지중추부사·도총관·동지의금부사 등의 요직을 역임하면서 전란의 타개에 진력하였다. 1597년(선조 30) 강릉부사로 혜정(惠政: 은혜로운 정치)을 베풀다가 순검사(巡檢使)가 되어 축성을 담당했고, 이어서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녹훈되고, 평성부원군(平星府院君)에 봉해졌다. 평소 성질이 탐비(貪鄙: 탐욕스럽고 비루함)하여 취렴(聚斂: 재산을 착취하여 모음)에 힘썼다는 사신(史臣)의 비평을 받았다.
그러나 예제(禮制)에 밝아 조선 전기 이래 복상시 때 입(笠)에 대한 정해진 제도가 없었는데, 경연에서 백포립(白布笠)을 쓸 것을 건의하여 그 뒤 준용되었다고 한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