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공 추대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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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고려시대사
사건
1269년(원종 10), 임연이 원종을 폐위하고 그의 동생 안경공 왕창을 옹립한 사건.
이칭
이칭
원종폐위사건(元宗廢位事件)
사건/사회운동
발생 시기
1269년(원종 10)
종결 시기
1269년(원종 10)
관련 인물
원종|임연|안경공
내용 요약

안경공 추대사건은 1269년(원종 10) 임연(林衍)이 원종(元宗)을 폐위하고 그의 동생 안경공(安慶公) 왕창(王淐)을 옹립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앞서 김준(金俊)이 원종 및 몽골과의 대립으로 제거되었듯이, 임연 역시 원종을 중심으로 한 친몽골 세력들에게 언제든지 제거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임연은 안경공 왕창의 옹립으로 교정별감(敎定別監)으로 임명되어 무신정권의 최고 직책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정의
1269년(원종 10), 임연이 원종을 폐위하고 그의 동생 안경공 왕창을 옹립한 사건.
발단

임연(林衍)은 1268년(원종 9) 무진정변(戊辰政變)을 통해 무신 주6 김준(金俊)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김준 제거에 참여했던 원종의 측근이었던 환관(宦官)들이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부상하였고, 원종도 임연보다는 이들을 신임하였다. 이에 임연은 1269년 6월에 환관 김경(金鏡)최은(崔𤨒)을 죽이고 어사대부 장계열(張季烈)대장군 기온(奇蘊)을 유배한 뒤 원종을 폐위하려 하였다.

경과 및 결과

이때 참지정사(參知政事) 유천우(兪千愚)는 몽골에 있는 세자 왕심(王諶)[훗날의 충렬왕]이 귀국할 때까지 거사를 연기할 것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주1 이장용(李藏用)은 사태를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원종을 폐위하는 대신 주7의 형식을 취할 것을 제안하였다.

임연이 원종의 폐위를 강행했던 것은 김준이 원종 및 몽골과의 대립으로 제거되었듯이, 그 역시 원종을 중심으로 한 친몽골 세력들에게 언제든지 제거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임연은 삼별초(三別抄)주2의 군사를 이끌고 주3을 위협하면서 안경공(安慶公) 왕창(王淐)을 옹립하였다. 이후 진암궁(辰嵓宮)에 있던 원종을 핍박하여 별궁(別宮)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뒤이어 임연이 교정별감(敎定別監)에 올라 무신의 집정이 되었다.

임연은 주5 곽여필(郭如弼)을 몽골로 보내 양위의 사실을 알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장군 유원적(愈元績)과 낭장(郎將) 정수경(鄭守卿) 등이 임연을 죽이고 원종의 복위를 꾀하려다 실패한 사건이 발생하였고, 서북면에서는 최탄(崔坦)한신(韓愼) 등이 임연의 처단과 원종의 복위를 기치로 저항하여 이후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또한 몽골에 갔던 세자가 귀국하는 길에 파사부(婆裟府)에서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몽골로 되돌아가 양위의 부당함을 호소하였다.

임연은 그해 9월에 주8 김방경(金方慶)과 대장군(大將軍) 최동수(崔東秀)를 몽골에 보내 양위의 사유를 재차 밝혔다. 하지만 몽골에서는 이를 믿지 않고 같은 해 11월에 병부시랑(兵部侍郎) 흑적(黑的)을 보내 원종과 안경공 왕창 및 임연의 입조(入朝)를 명하였다. 이러한 몽골의 압력에 의해 임연은 원종을 복위시키게 되었고, 안경공 왕창을 추대하려던 임연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원종은 복위 이후 스스로 몽골에 입조할 것을 제의하여, 세자가 돌아오지 않은 상태에서 작은아들 순안후(順安侯) 왕종(王悰)에게 국사(國事)를 맡기고 몽골로 갔다. 원종이 복위하자마자 서둘러 몽골로 갔던 것은 몽골에 의지해서 무신정권을 타도하고자 함이었다. 1270년(원종 11) 원종은 몽골 군대를 이끌고 귀국하여 주9에 출륙령(出陸令)을 반포한 뒤 주10 홍문계(洪文系)와 직문하(直門下) 송송례(宋松禮)의 도움을 받아 무신정권을 종식시켰다.

의의 및 평가

이 사건은 임연의 무신정권과 몽골의 직접적인 대립을 유발한 것으로 무신정권을 붕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원종이 복위하는 과정에서 고려 왕실이 몽골에 밀착되면서 무신정권 종식 이후 몽골의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커지게 된 사건이었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단행본

신호철 편, 『임연·임연정권연구』(충북대학교 출판부, 1997)
김당택, 『고려의 무인정권』(국학자료원, 1999)

논문

강성원, 「원종 대의 권력구조와 정국의 변화」(『역사와 현실』 17, 한국역사연구회, 1995)
강재광, 「무인정권 후기 대몽관계 변천과 고려왕조 정체성 변화의 성격」(『한국중세사연구』 46, 한국중세사학회, 2016)
고명수, 「고려 원종 대 이장용의 대몽 외교활동」(『한국인물사연구』 25, 한국인물사연구회, 2016)
신안식, 「고려 원종 11년(1270) 삼별초항쟁의 배경」(『명지사론』 13, 명지사학회, 2002)
이명미, 「몽골 복속기 권력구조의 성립: 원종 대 고려-몽골 관계와 권력 구조의 변화」(『한국사연구』 162, 한국사연구회, 2013)
주석
주1

고려 시대에, 중서문하성의 종일품 으뜸 벼슬. 성종 1년(982)에 처음으로 두고 문종 때 정원 및 품계를 정하였으며, 충렬왕 1년(1275)에 첨의중찬으로 고쳤다. 우리말샘

주2

고려 시대에, 무신 정권 집권자의 사병 집단. 또는 사병 숙소. 경대승이 신변 보호를 위하여 처음 설치하였고 최충헌도 이를 계승하여 이곳에서 정사(政事)를 처리하였는데 원종 11년(1270)에 왕정 복구로 없앴다. 우리말샘

주3

모든 벼슬아치. 우리말샘

주5

고려 시대에, 중서문하성에서 간쟁(諫諍)을 맡아보던 종사품 벼슬. 문종 15년(1061)에 내사사인을 고친 것이다. 우리말샘

주6

정권을 잡고 있는 사람. 우리말샘

주7

임금의 자리를 물려줌. 우리말샘

주8

고려 시대에, 추밀원에 속한 정삼품 벼슬. 헌종 1년(1095)에 중추원 부사를 고친 것이다. 우리말샘

주9

‘강화’의 다른 이름.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고의 침입으로 도읍을 이곳으로 옮긴 후, 원종 11년(1270)에 환도(還都)할 때까지 39년 동안 임시 수도로 삼았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우리말샘

주10

고려 시대에, 어사대에 속한 종사품 벼슬. 우리말샘

집필자
신안식(가톨릭대학교 연구교수, 고려시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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