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5년(순조 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 · 성균관전적 · 사간원정언 · 사헌부지평 · 세자시강원문학 등을 거쳐 1831년 전라도장시도사(全羅道掌試都事)가 되었다. 1832년 홍문관교리에 발탁되었고, 1835년(헌종 1) 우부승지가 되었다. 그 뒤 초산부사 · 공조참의를 거쳐 1847년 대사간이 되었다. 초산부사로 있을 때에는 진정(賑政)에 힘쓰고 환곡(還穀) · 전결(田結)의 폐단을 교정하는 등 여러 가지 치적을 쌓아 백성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지었다.
1853년(철종 4) 가선계(嘉善階)에 오르고 한성좌윤 · 병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855년 장헌세자(莊獻世子: 사도세자)의 추존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대사간 박내만(朴來萬)의 탄핵을 받고 상원에 유배되었다. 이어서 지도(智島)에 안치되었다가 그 해에 석방되었다. 1856년 가의대부(嘉義大夫)의 품계에 올랐으나 나가지 않았다. 1857년 제자들이 지어준 뇌암(雷巖)의 만우재(晩愚齋)에서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1860년 동지춘추관사가 되고, 이듬해 별세하였다.
유치명은 경학(經學) · 성리학 · 예학(禮學) 등 여러 분야에 정통하여 학문적으로 큰 업적을 남겼다. 특히, 성리설에 있어서는 이상정의 학설을 계승하여 이(理)를 활물(活物)로 보고 이의 자발적 동정(動靜)에 의해 기(氣)가 동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이는 능동능정(能動能靜)하는 신용(神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의 자발적 동정으로부터 음양오행의 기가 나오며, 이가 우주의 무체적인 실재(實在)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 있어서는 기발이승(氣發理乘)을 주장한 이이(李珥)의 학설을 공격하였다.
유치명은 이황(李滉) · 김성일(金誠一) · 장흥효(張興孝) · 이현일(李玄逸) · 이재(李栽) · 이상정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하였으며, 이진상(李震相) · 류종교(柳宗喬) · 이돈우(李敦禹) · 권영하(權泳夏) · 이석영(李錫永) · 김흥락(金興洛) 등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저서 및 편서로는 『정재문집(定齋文集)』 · 『예의총화(禮疑叢話)』 · 『가례집해(家禮輯解)』 · 『학기장구(學記章句)』 · 『상변통고(常變通攷)』 · 『주절휘요(朱節彙要)』 · 『대학동자문(大學童子問)』 · 『태극도해(太極圖解)』 · 『대산실기(大山實記)』 · 『지구문인왕복소장(知舊門人往復疏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