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관은 고려전기 동지추밀원사, 지추밀원사, 한림학사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출생일은 미상이며 1111년(예종 6)에 사망했다. 문종·숙종 시기 고려는 여진 정벌을 도모하다가 오히려 크게 참패당했을 정도로 여진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윤관은 패전 경험을 토대로 여진의 기병에 대항할 별무반을 창설하여 대비했고 예종 때 정벌을 개시하여 9성을 축조하고 남도지방 사람들을 이주시켜 살게 했다. 그러나 조정에서 여진의 적극적인 강화 요청과 9성 관리의 어려움을 들어 반환을 결정하면서 윤관은 문신들의 시기와 모함 속에 관직에서 물러났다.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동현(同玄). 고려 태조(太祖)를 도운 삼한공신(三韓功臣) 윤신달(尹莘達)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검교소부소감(檢校小府少監) 윤집형(尹執衡)이다.
문종(文宗) 때 과거에 급제하여 습유(拾遺) · 보궐(補闕)을 지냈다. 1087년(선종 4) 12월 합문지후(閤門祗候)로서 출추사(出推使)가 되어 광주(廣州) · 충주 · 청주를 시찰하였다. 1095년(숙종 즉위년) 10월 좌사낭중(左司郎中)으로 형부시랑 임의(任懿)와 함께 요나라에 파견되어 숙종(肅宗)의 즉위를 알렸다. 1098년(숙종 3) 동궁시학사(東宮侍學士)로서 조규(趙珪)와 함께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숙종의 즉위를 통고하였다.
1099년 우간의대부 한림시강학사(右諫議大夫翰林侍講學士)가 되었으나 당시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임의와 친척이어서 간원(諫院)인 어사대(御史臺)에 같이 있을 수 없다는 중서성(中書省)의 상서에 따라 직에서 물러났다. 1101년에는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이굉(李宏)과 함께 진사시(進士試)를 주관했으며 이어 어사대부가 되었다. 1103년 이부상서 동지추밀원사(吏部尙書同知樞密院事)를 거쳐 지추밀원사 겸 한림학사승지(知樞密院事兼翰林學士承旨)가 되었다.
윤관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1104년(숙종 9) 2월 동북면행영도통(東北面行營都統)이 되어 여진정벌의 임무를 맡을 때부터 1111년(예종 6) 죽을 때까지의 약 7년간이다. 고려가 처음으로 동여진을 대규모로 정벌하기 시작한 것은 1080년(문종 34)이었다. 이때 여진의 세력을 크게 꺾었다. 그러나 새로 일어난 동여진 완안부족(完顔部族)은 부족장 영가(盈歌)의 지휘아래 차츰 성장해 나갔고 1103년(숙종 8) 우야소(烏雅束)가 뒤를 이었을 때에는 그 세력이 함흥부근까지 미쳤다. 이리하여 고려군과 우야소의 여진군은 충돌 직전에 들어갔으며 이듬해 완안부의 기병이 정주관(定州關) 밖까지 쳐들어오게 되었다.
숙종은 무력으로 여진 정벌을 결심하고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임간(林幹)에게 평정하도록 했으나 오히려 여진에게 크게 패하였다. 이때 윤관이 왕명을 받고 여진에 대한 북벌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1104년(숙종 9) 2월 21일 당시 추밀원사로 있으면서 동북면행영병마도통이 되어 3월에 여진과 싸웠다. 그러나 여진의 강한 기병에 부딪혀 그 태반이 죽고 적진에 함몰되는 패전을 당하였다. 어쩔 수 없이 임기응변으로 화친을 맺고 일단 철수하였다. 여진의 기병을 고려의 보병으로 감당할 수 없음을 간파하고, 왕에게 전투력의 증강과 기병의 조련을 진언하였다. 이에 12월부터 여진 토벌을 위한 준비에 전력을 기울였으며 그 결과 별무반(別武班)이라는 특수부대의 창설을 보게 되었다.
1107년(예종 2) 여진족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변장(邊將)의 보고를 접하자 원수(元帥)가 되어 부원수인 지추밀원사 오연총(吳延寵)과 17만 대군을 이끌고 정주로 출발하였다. 한편, 여진 추장에게 거짓통보를 하여 고려가 앞서 잡아둔 허정(許貞) · 나불(羅弗) 등을 돌려보낸다고 하자 여진족이 400여 명을 보내왔다. 이때 이들을 유인해 거의 섬멸시키고 사로잡았다. 5만 3,000천명을 거느리고 정주에 도착한 뒤 중군(中軍)은 김한충(金漢忠), 좌군(左軍)은 문관(文冠), 우군(右軍)은 김덕진(金德珍)으로 하여금 지휘하게 하였다. 수군(水軍)은 선병별감(船兵別監) 양유송(梁惟竦) 등 2,600명으로 도린포(都鱗浦: 함경남도 정평군과 함주군에 걸쳐 있는 호수. 광포호 혹은 도련포라 불린다)의 바다로부터 공격하였다.
막강한 고려군의 위세에 눌린 여진이 동음성(冬音城)으로 숨자 정예부대를 동원해 이를 격파하였다. 여진군이 숨은 석성(石城)은 척준경(拓俊京)을 시켜 공격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태반을 섬멸하였다. 여진의 전략거점을 무찌른 곳은 135개 처이고 전사자 4,940명, 생포 1,030명의 빛나는 전과를 거두었다. 조정에 전승 보고를 올리고 탈환한 각지에 장수를 보내 국토를 획정하고 9성을 축조하였다.
그리고 남쪽으로부터 백성을 이주시켜 남도지방의 이주민들이 이곳을 개척해 살게 되었다. 새로 성을 구축한 곳은 함주(咸州)에 이주민 1,948가구, 영주(英州)에 성곽 950칸과 이주민 1,238가구, 웅주(雄州)에 성곽 992칸과 이주민 1,436가구, 복주(福州)에 성곽 774칸과 이주민 680가구, 길주(吉州)에 성곽 670칸과 이주민 680가구, 공험진(公嶮鎭)에 이주민 532가구였다. 이 6성 외에 이듬해에는 숭녕(崇寧) · 통태(通泰) · 진양(眞陽)의 3성을 더 쌓아 이른바 윤관의 9성 설치가 완결되었다. 특히 함흥평야의 함주에 대도독부(大都督府)를 두어 가장 중요한 요충지로 삼았다.
이렇게 함경도 일대를 석권하자 그곳에 웅거하던 우야소가 반발해 1108년(예종 3) 초에 군사를 이끌고 정면으로 대결하게 되었다. 고려군은 가한촌(加漢村) 전투에서 포위당했으나 척준경 등의 활약으로 겨우 구출되었다. 영주성의 공방전에서도 역시 척준경의 용맹과 기지로써 여진군을 물리치게 되었다. 또 여진군 수만 명에게 웅주성이 포위되었을 때에도 척준경의 활약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해 3월 30일 포로 346명, 말 96필, 소 300두를 노획해 개경으로 개선하니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 지군국중사(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知軍國重事)에 봉해졌다.
그러나 서쪽에 강력한 요나라와 접경하고 있던 여진이었기에 고려와 평화를 회복하는 것은 매우 절실한 일이었고 더욱이 윤관의 9성 축조와 농업이주로 말미암아 그들의 농경지를 빼앗겼으니 토착여진족들로서는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진족은 영원히 배반하지 않고 조공을 바친다는 조건 아래 성을 돌려주기를 청하였다. 여진은 적극적으로 강화교섭을 개시했으며 이에 예종(睿宗)은 육부(六部)를 소집하여 9성 환부를 논의하였다.
평장사(平章事) 최홍사(崔弘嗣) 등 28명은 찬성하고, 예부낭중(禮部郎中) 한상(韓相)은 반대했으나 고려조정의 대세는 화평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 이유는 여진을 공략함에 있어 당초에 한쪽 통로만 막으면 될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러한 예측이 맞아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근거를 잃은 여진족의 보복이 두려웠고 개척한 땅이 너무 넓고 거리가 멀어 안전을 기할 수 없다는 점도 화평의 주요한 요인이었다. 그리고 9성을 지키기 위해 무리하게 군사를 동원할 경우 백성들의 원망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함께 있었다.
결국 1109년(예종 4) 7월 3일 회의를 열고 9성 환부를 결의해 7월 18일부터 9성 철수가 시작되었다. 윤관이 장병들과 더불어 생명을 걸고 경략했던 9성 일대의 땅이 다시 여진에게 환부된 것이다. 그렇지만 매우 역설적인 것은 훗날 아쿠타[阿骨打]가 금나라를 세워 강대한 국가를 이룰 수 있었던 데에는 이때 찾은 9성이 그 기반이 되었다는 것이다. 9성의 환부로 여진 정벌이 실패로 돌아가자, 패장의 모함을 받고 문신들의 시기 속에 관직과 공신호조차 삭탈 당하였다. 명분 없는 전쟁으로 국력을 탕진했다 하여 처벌하자는 주장도 대두되었다. 회군해서는 왕에게 복명도 못한 채 사제(私第)로 돌아갔다.
그러나 윤관의 처벌을 주장했던 재상 · 대간(臺諫)들을 물리치며 비호한 예종의 덕으로 1110년 12월 수태보 문하시중 판병부사 상주국 감수국사(守太保門下侍中判兵部事上柱國監修國史)가 내려졌으나 사의를 표하였다. 1111년(예종 6) 5월 세상을 떠났다. 윤관장군묘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사적, 1988년 지정)에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었으나, 1130년(인종 8) 예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면서 수릉(綏陵)의 휘(諱)를 피하여 문숙(文肅)으로 고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