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원로(元老), 호는 매운당(梅雲堂) · 백화헌(百花軒). 농서군공(隴西郡公) 이장경(李長庚)의 아들이다.
1294년(충렬 20) 10월 향공진사(鄕貢進士)로 과거에 급제하여 안남서기(安南書記)에 보직되고, 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를 거쳐 지합주사(知陜州事) · 비서랑(秘書郎) 등을 지냈다.
1306년 11월 비서승으로 왕을 호종하여 원나라에 갔을 때 왕유소(王惟紹) · 송방영(宋邦英) 등이 충선왕을 모함하여 충렬왕 부자를 이간시키고 서흥후 왕전(瑞興侯 王琠)으로 하여금 충렬왕의 후계를 삼으려 획책하다가 충선왕의 세력이 커지자 처벌된 일이 있었다.
같은 해 5월 어느 파에도 가담하지 않고 최진(崔晉)과 단지 충렬왕을 보필하고 있었으나 그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그 뒤 귀양에서 풀려나와 13년간 고향에서 은거하면서 한번도 자신의 무죄를 호소하지 않았다.
당시 충숙왕은 5년간이나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었기 때문에 심양왕 왕고(瀋陽王 王暠)가 왕위 찬탈을 도모하자 홀로 원나라에 들어가서 중서성(中書省)에 그 부당함을 상소하여 이러한 음모를 분쇄하였다. 1325년(충숙왕 12) 왕이 귀국하자 감찰장령으로 발탁되고, 전리총랑(典理摠郎)으로 관동 지방을 안무(按撫)하였다.
1327년 충숙왕이 원도(元都)에 있을 때 왕을 도운 공로로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서 이등공신이 되었으며, 이어 군부판서(軍簿判書)에 승진하였다. 이때 충숙왕은 심왕당(瀋王黨)의 끊임없는 모략으로 왕위를 심왕에게 선양(禪讓)하려 하였으나 한종유(韓宗愈) 등과 함께 극력 반대하여 이를 저지시켰다.
1330년 12월 충혜왕이 즉위하자 장령이 되었고, 그 뒤 여러 번 충혜왕을 따라 원나라에 내왕하였다. 1340년(충혜 복위 1) 4월 정당문학에 승진하였고, 예문관대제학이 되어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충혜왕의 음탕함을 여러 번 간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1341년 12월 성산군으로 사직을 청하였다. 1342년(충혜 복위 3) 6월 조적의 난 때 호종한 공로로 성근익찬경절공신(誠勤翊贊勁節功臣)에 녹권되고 벽상(壁上)에 도형(圖形)되었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시조 1수가 전한다. 1343년 5월 세상을 떠났다.
뜻이 확고하고 할 말은 하는 엄격한 성품 때문에 경외시되었으며, 역임한 관직에서 많은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공민왕 때 성산후(星山侯)에 추증되고, 충혜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