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鄭地, 1347~1391)는 전라도 나주 출신의 무신이다. 수군의 최고 지휘관으로 왜구를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전문적인 수군을 양성하고 전술 훈련 보급으로 수군의 전투력을 향상시키는 한편, 화포를 장착한 전함의 건조를 건의하고 실행에 옮겼다. 1383년(우왕 9)에는 남해 관음포전투에서 화포를 장착한 전함으로 왜구 선단을 대파하였다.
1388년(우왕 14) 위화도회군에 동참하였으나 일명 김저(金佇) 사건과 윤이(尹彝) · 이초(李初)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1391년(공양왕 3) 회군의 공으로 이등공신이 되었으나 관직에서 물러나 광주에 살다가 45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조선 초, 정지의 업적이 인정되어 경렬(景烈)의 시호를 받았고 후손을 서용(敍用)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정지장군예장석묘는 광주 무등산 자락인 노고지리산 북동쪽에 있다. 골짜기 사이로 북동-남동 방향으로 뻗어내린 작은 능선 위에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묘역에는 3개의 기단이 설치되어 있는데 가장 위쪽 기단 위에 석축을 쌓은 뒤 정지의 묘를 조성하였다. 아래쪽에는 아들 정경(鄭耕, 1369~1421)의 무덤이 있다.
정지의 묘는 능선 방향과 축선이 다르게 조성되었는데, 좌향이 남향에 가깝다. 봉분은 평면 장방형으로 고려~조선 전기에 유행한 방형분(方形墳)의 형태이다. 봉분 전면과 측면에 깬돌로 석축을 쌓았는데 봉분이 경사면을 따라 조성되어 전면 석축은 높이가 약 1m이지만, 측면은 위로 갈수록 높이가 낮아져 후면에는 석축이 확인되지 않는다.
봉분 석축 위에는 흙을 쌓지 않아 단면이 장방형에 가깝다. 봉분 둘레에 호석을 두르고 위로 흙을 돋아 쌓은 일반적인 방형분의 구조와 차이가 있다. 봉분 앞에는 후대에 건립한 묘비가 2기 세워져 있는데 부인 밀양박씨와의 합장묘라 기록되어 있다.
봉분 전면에 설치된 1단의 계체석에 잇대어 상석과 향로석이 놓여 있으며, 그 앞으로 문인석 1쌍이 좌우에 세워져 있다. 문인석은 복두공복(幞頭公服)에 홀(笏)을 수직으로 들고 있는 형식으로 무덤 조성 당시 또는 이후 비교적 가까운 시기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묘역 아래에는 정지의 사당인 경렬사(景烈祠)가 자리한다.
정지장군예장석묘는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산176에 있다. 1975년 12월 30일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광주광역시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정지의 묘소는 정지장군유적보존회에서 묘역을 정화 · 관리하여 현재의 모습에 이르고 있다.
묘역 아래의 경렬사는 1644년(인조 22) 지금의 광주광역시 동구 동명동에 있었으나, 19세기 말 철거되었고 1981년 현재 위치에 복원한 것이다. 경내에는 외삼문과 내삼문, 사우(祠宇), 전시관, 옛터에서 옮겨 온 경렬사유허비(景㤠詞遺墟碑)가 있다.
정지장군예장석묘는 고려~조선 전기 방형분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으며, 당대 왜구 격퇴에 큰 공을 세운 탁월한 전략가이자 수군의 창시자로 평가받는 정지의 업적과 생애를 살펴볼 수 있는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