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가행(可行), 호는 만운(晩雲). 고려 명장 정지(鄭地)의 9대 손으로, 아버지는 금천군(錦川君) 정윤(鄭綸)이다.
어머니는 영천 이씨(永川李氏)로 이인조(李仁祚)의 딸이다. 미천한 집에서 태어났으며 절도영(節度營)에 속한 정병(正兵)이었고, 부(府)에 예속된 지인(知印: 通引)을 겸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종군하였다. 이때 권율이 장계를 행재소에 전달할 사람을 모집했으나 응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17세의 어린 그가 가기를 자청하고는 왜군으로 가득한 길을 단신으로 뚫고 행재소에 도착하였다.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이 그에게 사서(史書)를 가르쳤는데 머리가 총명하여 아들같이 사랑하였다. 이 해 가을에 행재소에서 실시하는 무과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1621년(광해군 13) 만포첨사로 국경을 수비했으며, 이때 명을 받고 여진족 진에 들어가 여러 추장을 만나기도 하였다.
1623년(인조 1) 안주목사로 방어사를 겸임하고, 다음해 이괄(李适)의 난 때는 도원수 장만(張晩)의 휘하에서 전부대장(前部大將)이 되어 이괄의 군사를 황주와 서울 안산(鞍山)에서 무찔러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으로 금남군(錦南君)에 봉해졌다.
이괄과 친분이 두터웠던 그는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에 문회(文晦) 등의 고발로 체포되었으나 은혜를 입고 풀려났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부원수를 지냈고, 1633년 조정에서 후금(後金: 淸)에 대한 세폐의 증가에 반대, 후금과의 단교를 위하여 사신을 보내게 되었는데 김시양(金時讓)과 함께 이를 반대하여 당진에 유배되었다. 이후 다시 장연으로 이배되었다가 곧 풀려 나와 이듬해 포도대장 · 경상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1636년 병이 심해지자 왕이 의관에게 명해 치료에 진력하게 했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왕이 내시로 하여금 호상하게 하고 어복(御服)을 주어 수의(禭衣)로 하게 했으며, 관청에서 의로써 장사를 치르게 하였다. 키가 작으면서도 씩씩했고 덕장이라는 칭송을 들었으며, 민간에 많은 전설을 남겼다.
천문 · 지리 · 복서 · 의술 등 다방면에 걸쳐서 정통했으며, 청렴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광주(光州) 경렬사(景烈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만운집』 · 『금남집(錦南集)』 · 『백사북천일록(白沙北遷日錄)』 등이 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