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윤양계 고택 ( )

주생활
유적
문화재
조선 후기에 건립된, 충청북도 충주시에 있는 한옥.
이칭
이칭
중원 윤민걸가옥
약칭
윤양계 고택
유적/건물
건축 양식
한옥
건립 시기
조선 후기
정면 칸수
안채 6칸, 사랑채 3칸, 아래채 5칸
측면 칸수
안채 1.5칸, 사랑채 2칸, 아래채 1.5칸
정면 너비
안채 15.66m
측면 길이
안채 7.68m
건물 높이
안채 4.8m
건물 층수
1층
규모
1필지, 5,712㎡
소재지
충청북도 충주시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국가민속문화재(1984년 1월 14일 지정)
소재지
충청북도 충주시
내용 요약

충주 윤양계 고택은 조선 후기에 건립된 충청북도 충주시에 있는 한옥이다. 앞으로는 하천이 흐르고 뒤로는 나지막한 산이 둘러싼 대지에 위치한 이 집은 문간채, 안채, 사랑채, 아래채, 사당채, 광채 등 여러 채로 구성된다. 안채와 사랑채, 아래채 등 주요 채들이 대지의 중앙에 위치하고 사방에 외부 공간을 두었다. 안채와 아래채는 ㄱ자형 집이고 사랑채는 일자형인데, 채와 마당이 잘 대응하도록 각 채의 공간을 구성했다. 이러한 배치와 유연한 공간 구성을 통해 19세기 후반의 생활 방식과 주거 공간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정의
조선 후기에 건립된, 충청북도 충주시에 있는 한옥.
건립 경위

충주 윤양계 고택(忠州 尹養桂 古宅)은 주1 윤양계(尹養桂, 1822~1912)가 1873년(고종 10)에 건립한 집으로, ‘임오생도편수백치경(壬午生都便首白致景)’이라는 상량문(上樑文)에서 도편수인 백치경이 지었음을 알 수 있다.

변천

담으로 둘린 영역으로 진입하는 중문간 혹은 안행랑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주6만 설치되어 있다. 문간채는 한때 5칸이었으나 지금은 7칸으로 칸수에 변화가 있었다.

형태와 특징

이 집은 앞에 하천이 흐르고 농경지가 분포하며 뒤로는 나지막한 산이 둘러싼 대지에 지어졌다. 대지와 농경지 사이로 마을길이 지나간다. 이 집은 문간채, 안채, 주2, 주3, 주4, 주5 등 여러 채로 구성된다. 동향을 한 아래채와 광채 이외의 채들은 대체로 북향을 하고 있다. 안채, 사랑채, 아래채는 일정하지 않은 모양의 담으로 둘리어 있는데 채와 담 사이에는 사방으로 외부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사당채와 광채는 담과 연결되어 대지 경계를 이룬다. 안채와 사랑채, 아래채 등 주요 채들이 대지의 중앙에 위치하고 사방의 외부 공간에 대응하는 공간 구성을 가진 것이 이 집의 특징이다.

안채는 대지의 중앙에 앞으로 넓은 마당을 두고 배치되었다. 부엌, 안방, 웃방 대청, 건넌방으로 구성된 몸채에 건넌방에서 꺾여 두 칸이 돌출해 날개채를 이룬 ㄱ자형 집이다. 날개채는 한 칸 반 크기의 방과 반 칸 크기의 주7 부엌으로 구성되었다. 뒤로 골방을 내달아 사랑채 쪽으로 폐쇄적으로 구성하였다. 몸채의 서쪽 끝에 위치한 건넌방 옆(서쪽)으로 마루방(고방)을 한 칸 돌출시켜 몸채는 7칸이 되었고 안채의 전체적인 모양은 T자형이 되었다. 칸의 크기로는 크게는 부엌의 2.88m에서 작게는 마루방의 2.1m로 일정하지 않다. 몸채는 앞(북쪽) 마당 쪽으로 툇마루를 설치했으며, 우물과 장독대가 있는 뒤(남쪽) 마당 쪽에 쪽마루를 뒤어 앞뒤의 마당으로 원활히 연결되도록 하였다. 몸채는 전퇴가 있는 1고주 5량 구조이고 고방과 날개채는 3량 구조이다. 지붕은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아래채는 부엌, 아랫방, 웃방, 광으로 구성된 5칸의 몸채에 부엌 앞으로 뜰아랫방을 한 칸 돌출시킨 ㄱ자형 집이다. 몸채의 두 칸 방 앞(동쪽)에 툇마루를 설치하고 뒤, 안채 쪽으로 쪽마루를 두어 채의 앞뒤가 원활히 연결되도록 하였다. 광은 흙바닥 공간인데, 안채 뒷마당 쪽으로만 문을 설치해 안채와 연계해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가구는 몸채는 4량, 돌출부는 3량이며, 지붕은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안채와 아래채의 부엌과 함실 위에는 다락을 설치해 인접한 실에서 수납공간으로 사용한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일자형 집으로 아랫사랑방, 윗사랑방, 대청으로 구성되었다. 대청은 깊이 방향으로 두 칸이고 실들은 앞에 퇴가 있어 기둥열이 일치하지 않는다. 사랑채는 자연석 기단 위에 외벌대 장대석 기단을 설치한 두 단의 기단 위에 지어졌는데 기단이 낮고 깊어 월대와 같은 느낌이다. 가구는 전퇴가 있는 1고주 5량이고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사당은 3칸으로 맞배지붕을 이었다.

의의 및 평가

안채를 중심으로 사랑채는 근접해서 나란히 배치되었고 아래채는 직각으로 배치되었다. 이는 전형적인 전통한옥과는 다른 자유로운 배치 방식이다. 안채의 평면구성과 형태도 독특하다. 또한 채를 이루는 칸의 크기도 일정하지 않고 실마다 다르다. 이에 따라 기둥의 배열도 일정하지 않다. 이러한 독특한 배치와 유연한 공간 구성은 19세기 후반의 생활 방식에 대응한 결과로 생각된다. 이 집의 가치는 당시의 생활과 주거 공간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주는 자유로운 배치와 구조 방식이라는 점이다.

참고문헌

단행본

『충청북도 문화재대관』 2(충청북도 문화재연구원, 2017)

인터넷 자료

문화재청(https://www.cha.go.kr)
주석
주1

조선 시대에 둔 종육품 무관 벼슬. 세조 12년(1466)에 병마단련판관을 고친 것이다. 우리말샘

주2

사랑으로 쓰는 집채. 우리말샘

주3

여러 채로 된 집의 아래쪽에 있는 집채. 우리말샘

주4

한 집 안에 여러 개의 집채가 있을 때 사당이 있는 집채. 우리말샘

주5

안채에서 따로 떨어진, 광이 있는 집채. 우리말샘

주6

대문간이 따로 없이 양쪽에 기둥을 하나씩 세워서 문짝을 단 대문. 우리말샘

주7

부넘기가 없이 불길이 그냥 곧게 고래로 들어가게 된 아궁이 구조.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3)
집필자
한필원(한남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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