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엽(許曄)은 1517년(중종 12)에 태어났으며,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태휘(太輝), 호는 초당(草堂)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허창(許菖), 할아버지는 허담(許聃)이다. 아버지는 증이조참판(贈吏曹參判) 허한(許澣)이다. 어머니는 돈녕부판관(敦寧府判官)을 지낸 성희(成喜)의 딸이다. 한숙창(韓叔昌)의 딸과 결혼하였다가 김광철(金光轍)의 딸 강릉김씨(江陵金氏)와 재혼하였다. 허영(許映)이 동생이다. 악록(岳麓) 허성(許筬), 하곡(荷谷) 허봉(許篈), 교산(蛟山) 허균(許筠) 등 세 아들이 있다. 난설헌(蘭雪軒) 허초희(許楚姬)가 딸이다.
나식(羅湜)에게 『 소학(小學)』과 『 근사록(近思錄)』을 배웠고, 이언적(李彦迪))을 사숙하였다.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었다.
1540년 진사시(進士試)에 입격하였고, 1546년(명종 1) 식년시 문과에서 갑과 3등 탐화랑(探花郞)으로 급제하였다. 명종 대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을 시작으로 이조좌랑(吏曹佐郞), 홍문관(弘文館) 부수찬(副修撰), 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1560년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1568년(선조 1) 진하책봉태자사(進賀冊封太子使)로 임명되어 박영준(朴永俊)과 함께 중국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1571년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었다. 1575년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병환 때문에 사직하였다. 이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1580년 병으로 상주(尙州)의 객관(客館)에서 64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노수신(盧守愼) · 이준경(李浚慶) · 심희수(沈喜壽) 등과 교류하였는데, 특히 노수신과 가깝게 지냈다. 본인을 비롯해 4남매의 문장이 모두 뛰어나 당시 사람들에게 ‘허씨오문장(許氏五文章: 허엽 · 허성 · 허봉 · 허난설헌 · 허균)'이라 불렸다고 한다. 사위 김성립(金誠立)과 우성전(禹性傳) 역시 문장으로 유명한 인물들이어서, 당시 사람들은 허씨 가문의 세력이 가장 크다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할 정도였다고 한다.
동서 분당 때 동인(東人)의 종주(宗主)가 되어 의론을 엄격하게 하였다고 한다.
1609년(광해군 1) 화곡서원(花谷書院)에 제향되었다. 화곡서원 개성 지역 유림들의 뜻에 따라 서경덕 · 박순(朴淳) · 민순(閔純) · 허엽의 덕행과 학문 등을 추모하고 계승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