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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자감(國子監)

고려시대사제도

 고려시대 설치된 국립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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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설치된 국립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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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연원 및 변천
1. 연원
국립대학은 태조 때부터 있었으며 그 명칭은 신라의 것을 계승한 국학(國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므로 992년(성종 11) 국자감의 창설은 종래의 국학을 당·송(唐宋)의 제도를 참착하여 정식 종합대학으로 개편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983년에 송나라로부터 「문선왕묘도(文宣王廟圖)」와 「제기도(祭器圖)」·「칠십이현찬기(七十二賢贊記)」를 가져온 것은 바로 이러한 기초작업으로 보인다.
2. 명칭 및 기능
국자감의 명칭은 1275년(충렬왕 1)에 원나라의 간섭으로 국학으로 개칭되었으며, 1298년 충선왕이 성균감(成均監)이라 고쳤고(1298년은 충렬왕 24년이지만 이해 1월부터 8월까지는 충선왕이 통치하고 있었던 기간임), 1308년에는 충선왕이 다시 즉위하면서 성균관이라 하였다. 그 뒤 1356년 공민왕의 배원정책에 따라 다시 국자감이라 하였다가, 1362년에 성균관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이러한 고려 말기의 잦은 명칭 변경은 내용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국자감은 본래 유학과 기술학을 교육하는 곳이었는데 뒤의 성균관은 기술학을 분리시키고 유학만 교육하는 기관으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주자학이 전래되어 경학(經學)과 사학(史學)이 중요시되면서부터이다.
그리하여 충선왕은 1298년에 명칭을 성균감이라 고치는 동시에 유학학부(儒學學部)에 명경학(明經學)을 더 설치하고 명경박사(明經博士)와 명경학유(明經學諭)를 새로 두어 종래의 유학학부 삼학(三學: 국자학·태학·사문학)과 기술학부 삼학(율학·서학·산학)에 명경학을 합해 칠학(七學)의 형성을 보게 되었다. 『고려사』에 보이는 칠관(七館)이니 하는 것은 바로 이 칠학을 두고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 뒤 성균감은 그 이름을 성균관이라 고치고 더욱 유학을 중요시하다가, 1389년(공양왕 1) 마침내 기술학은 분리되고 유학만을 교육하는 기관으로 개편되었다.
한편, 그 해에 십학(十學)이 새로 설치되어 종래 대학에 예속되었던 기술학이 그 가운데 포함되는 동시에 율학은 전법사(典法司), 산학은 판도사(版圖司), 서학은 전교시(典校寺)에서 그 교육을 맡게 되었다.
2. 직제
국자감의 직제는 성종 때 기초적인 편성을 보게 되었다. 이때에는 국자사업(國子司業)·국자박사(國子博士)·국자조교(國子助敎)·대학박사(大學博士)·대학조교(大學助敎)·사문박사(四門博士)·사문조교(四門助敎)가 있었다.
문종 때에 이르러서 직제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고문격이라고 할 수 있는 제거(提擧)·동제거(同提擧)·관구(管勾) 각각 2인씩을 두고 판사(判事) 1인을 두었는데 이들은 모두 타관(他官)을 겸하였고, 그 아래 좨주(祭酒) 1인, 사업(司業) 1인, 승(丞)·국자박사 2인, 대학박사 2인, 주부·사문박사 2인, 학정(學正) 2인, 학록(學錄) 2인, 학유(學諭) 4인, 직학(直學) 2인, 서학박사(書學博士) 2인, 산학박사(算學博士) 2인을 두었다.
이때의 직제로 큰 특징은 성종 때의 조교 대신 학정·학록·학유·직학을 둔 것이다. 직제상 박사는 정교원이고 조교는 부교원에 해당되는 것이나 조교 대신 학정·학록·학유·직학을 두어 그 직책을 전문화하였다.
학유는 학문을 중심으로 하여 경전(經傳)으로써 교유(敎諭)를 맡던 교원직, 학정은 학규(學規)에 따라 일반훈육을 맡던 교원직이고, 학록은 일반훈육과 권학(勸學)을 맡던 교원직이며, 직학은 학적(學籍)과 근태상황을 맡던 교원직으로 보인다.
그리고 예종 때 판사를 대사성(大司成)으로 고쳐 국자감의 전임직을 삼음으로써 사실상의 총장직(總長職)이 설치되었다. 이 밖에 말단사무를 담당하는 서사(書史)와 기관(記官)을 각각 2인씩을 두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1. 구성
구성은 조선시대의 성균관과 같이 문묘(文廟)와 학사(學舍)를 갖춘 것이었다. 문묘는 다시 선성전(宣聖殿)과 동무(東廡)·서무(西廡)를 갖추어 공자를 비롯해 61제자와 21현을 제사하였다.
학사는 강학소(講學所)인 돈화당(敦化堂)주 01)이 있고 학생들의 기숙사인 재(齋)가 있었으며 그밖에 제생들의 음식제공을 맡는 양현고(養賢庫)가 있었다.
2. 학부 편성 및 입학 자격
학부편성은 유학학부와 기술학부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입학자격은 유학학부에 있어서는 귀족자제를 대상으로 하여 국자학은 대개 문무관 3품 이상, 대학은 5품 이상, 사문학은 7품 이상의 자제가 입학하였다.
그리고 기술학부는 율학·산학·서학 모두가 8품 이하의 자제와 서인(庶人)이 입학하였다. 유학학부의 입학은 신분상 자격이 있는 자는 그 전원을 수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그 인원이 수용능력에 초과하였을 때는 연령이 높은 자로부터 입학시켰다.
또, 기술학부는 그 입학대상이 8품 이하의 자제로부터 서인에 이르는 광범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일정한 전형절차가 있었을 것이 짐작된다.
3. 정원 및 수업 연한
고려의 학식(學式)에 의하면 정원은 국자학·대학·사문학이 각각 300인씩으로 모두 900인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의 수용인원은 그에 미치지 못해 모두 60 내지 70인에 불과하였던 것 같고, 고려 말기에 가서 100인 정도의 정원을 확보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기술학부의 정원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수요에 따라 증감이 있었던 것 같다. 참고로 조선 초기의 것으로 미루어 보면 율학이 40인 내외, 서학과 산학이 각각 15인 내외로 추측된다.
수업 연한은 대학에 진학하는 직접적인 목적이 과거준비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일단 과거에 합격하면 교육을 더 받을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수업 연한을 설정한다는 것은 별로 의의가 없었다.
그러나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자에게는 상한수업연한을 설정하였다. 유생(儒生)으로 9년, 율생(律生)으로 6년을 재학해 과거에 합격하지도 못하고 성업(成業)의 가망도 없는 자는 출학시켰다.
4. 수업 과목 및 교과 과정
수업과목과 이수연한은 『논어』·『효경』은 함께 1년을 한도로 이수하도록 되어 있고, 『상서』·『공양전』·『곡량전(穀梁傳)』은 각각 2년반, 『주역』과 『모시』·『주례』·『의례』는 각각 2년, 『예기』와 『좌전』은 각각 3년이었다.
그러나 중경(中經)에 해당되는 『주역』·『모시』·『주례』·『의례』가 각각 2년인데 비해 소경(小經)에 해당되는 『상서』·『공양전』·『곡량전』이 2년 반이라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결국 소경의 이수연한은 2년 반이 아니라 1년 반의 잘못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수연한은 최장의 연한을 말하는 것으로 능력에 따라 그 기간을 단축할 수 있는 것이었다. 또, 율학 이외의 서학과 산학도 기록이 자세하지 않으나, 율학에 준해 최고 6년을 한도로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교과과정은 유학학부에 있어서 교양필수과목이 『논어』와 『효경』이었으며 전공과목은 『주역』과 『상서』·『주례』·『예기』·『의례』·『모시』·『좌전』·『공양전』·『곡량전』의 9경으로 되어 있다.
그 밖에 산술(算術)과 시무책(時務策)을 익히고, 여기에 매일 한장씩의 습자를 하였으며, 『국어(國語)』와 『설문(說文)』·『자양(字樣)』·『자림(字林)』·『삼창(三倉)』·『이아(爾雅)』를 읽도록 되어 있다.
산술과 시무책·습자를 과한 것은 장차 관리가 됨에 있어서 그 기초교양을 갖추게 하기 위한 것이라 하겠으며, 자전류(字典類)가 과해진 것은 문자생활의 원숙을 기하기 위한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전공과목은 전공하는 경서 하나를 완전히 이수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옮기지 못하였으며, 전공하는 경서의 선택은 희망에 따라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
5. 교수 방식 및 운영
교수방식은 9경에 의한 9재(齋)의 제도, 즉 1경 1재제에 의해 수업을 운영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9재의 제도가 갖추어지기는 예종 때 7재의 제도를 갖춘 것을 비롯해 고려 말 공민왕 때 그 정비를 보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 교수의 방식은 박사 또는 학유(學諭) 한 사람에게 학생 5인 내외를 배정하고 학생 한 사람에 2문(問) 정도를 질문하게 하여 논란하고 의혹을 오변(悟辨)하게 하였다.
교과운영은 박사 또는 학유가 책임을 지도록 되어 있어 수강하는 학생이 그 수강과목을 종강할 때까지는 다른 관직으로 옮기지 못하게 하였다.
재정은 수용비(需用費)를 비롯한 유지비·양사비(養士費) 등 상당한 것을 필요로 하였다. 그 재정의 근원이 되는 것은 토지였다. 992년에 국자감의 창설과 함께 토지를 지급하였다는 것이 보이나 그 분량은 정확히 알 수 없다.
이렇게 대학 재정이 토지에 기초를 두었기 때문에 수조체제(收租體制)가 무너지면 재정난을 겪었고 대학의 운영도 부실해졌다. 예종 때 대학 진흥책을 실시하면서 7재의 제도를 마련하고 양현고(養賢庫)를 설치한 것은 재정난으로 부진상태에 있었던 것을 정상화시키기 위한 개혁이었던 것이다.
고려 중엽 이후 토지겸병이 자행되어 토지제도가 문란해지고, 거기에 몽고와의 전쟁과 권문세가의 횡포가 겹쳐 고려 후기의 토지제도는 더욱 문란해 졌다.
여기에서 대학의 토지수입이 극도로 감소되어 그 운영이 마비상태에 빠지게 되자 여러 가지의 정책을 실시하였다. 충렬왕 때는 안향(安珦)의 건의로 문무백관으로부터 은(銀)과 포(布)를 양현고에 내게 하여 이른바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는 등의 미봉책은 재정에 어느 정도의 도움이 되었을 것은 틀림없으나 근본적인 해결에는 미치지 못해 부진을 면하지 못했다.
6. 특전
국자감의 학생에게는 과거응시에 대한 특전이 주어졌다. 과거에 응시하려면 전국에서 실시하는 예비시험에 합격해야 하였고, 다시 국자감에서 행하는 재시험 즉 감시(監試)에 합격해야만 자격이 주어졌다.
그러나 국자감의 학생은 입학해 3년을 수학하면 성적에 관계없이 예비시험이 면제되어 직접 감시를 거쳐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더욱이, 학업성적이 우수한 자는 감시뿐만 아니라 과거의 제1장 또는 제2장까지 면제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학예(學藝)를 시험해 그 성적이 4분(分) 이상 13분 이하가 되는 자에게는 과거의 제1장을 면제하고 제2장에 나아가 응시할 자격을 주었고, 14분 이상이 되는 자에게는 과거의 제1장과 제2장을 모두 면제하고 직접 제3장에 나아가 응시할 자격을 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고려시대의 최고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한 국자감은 성균관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그 명칭과 기능은 조선시대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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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01
후의 明倫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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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 (1995년)
민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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