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화 ()

현정론
현정론
불교
인물
조선 초기 불교계를 대표하는 선승이자 학승으로 호불 논서 『현정론』의 저자.
이칭
함허(涵虛), 득통(得通)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376
사망 연도
1433
본관
충주(忠州)
출생지
충청북도 충주
주요 저서
함허당득통화상어록, 현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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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기화는 조선 초기 불교계를 대표하는 선승이자 학승으로 호불 논서 『현정론』의 저자이다. 태종 대에 시행된 승정 체제의 개편과 세종 대에 이루어진 선종과 교종의 양종 체제 출범 속에서 불교의 전통을 지키고 선과 교를 계승하는 데 기여했다. 선승으로서 『어록』을 남겼고 『원각경』 등 경론에 대한 주석서를 썼으며 불교 비판론에 대해 반박하고 불교의 장점을 역설한 『현정론』을 지었다.

정의
조선 초기 불교계를 대표하는 선승이자 학승으로 호불 논서 『현정론』의 저자.
가계 및 인적사항

본관은 충주(忠州), 속성은 유씨(劉氏)이다. 호는 득통(得通), 당호는 함허(涵虛)이고, 첫 법명은 수이(守伊), 첫 법호는 무준(無準). 법명은 기화(己和)이다. 충청북도 충주(忠州) 출신으로 아버지는 전객시사(典客寺事) 청(聽)이고, 어머니는 방 씨(方氏)이다.

주요 활동

어려서 유학을 배우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유학을 공부했다. 북한산 승가사(僧伽寺)에서 승려와 이야기를 나누고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396년(태조 5)에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관악산 의상암(義湘庵)에서 출가했다. 이듬해 경기도 양주 회암사(檜巖寺)로 가서 왕사인 무학(無學) 자초(自超)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후 여러 곳을 다니다가 1404년(태종 4)에 회암사로 다시 와서 수행에 매진했다. 11종 242사의 승정 체제 개편이 단행된 1406년에는 공덕산 대승사(大乘寺)로 가서 4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반야경』을 강의했다. 1410년 개성의 천마산 관음굴(觀音窟)에서 선을 크게 일으켰고, 1411년부터 3년간 불희사(佛禧寺)에 머물렀다. 1414년에는 황해도 평산의 연봉사(烟峯寺)에 있으면서 당호를 함허당(涵虛堂)이라 했다. 1417년부터 2년간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를 세 번 강의했는데 그 강의안이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였다.

1420년(세종 2)에는 강원도 오대산 영감암(靈鑑庵)에서 조사(祖師)인 나옹 혜근(懶翁惠勤) 진영에 참배했다. 이때 꿈에서 신이한 승려가 나와서 기화라는 법명과 득통(得通)이라는 호를 지어주었다고 한다. 1421년 가을에는 세종의 명으로 개성 대자암(大慈菴)에 가서 태종의 비이자 세종의 모후인 원경왕후를 천도하는 영산재(靈山齋)를 베풀었다. 7개 불교 종파가 선교양종으로 통합된 1424년에는 길상산(吉祥山) · 공덕산(功德山) · 운악산(雲岳山) 등을 두루 다니며 가르침을 펼쳤다.

1431년 문경의 희양산 봉암사(鳳巖寺)를 중수하고 머물다가, 1433년 4월 1일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했다. 제자로는 문수(文秀) · 홍준(弘濬) · 학미(學眉) · 달명(達明) · 지생(智生) · 해수(海修) · 도연(道然) · 윤오(允悟) 등이 있다.

학문과 저술

기화는 조선 초의 대표적 고승으로서 선뿐 아니라 교학에도 정통하여 『금강경』, 『원각경』 등에 대한 주석서를 남겼다. 그는 개인의 근기에 따라 다양한 방식의 수행법을 인정하면서 간화선(看話禪)을 최상의 수행법으로 내세웠다. 또 선과 교의 근원적 일치를 인정하면서도 선과 교가 나뉜 것에 대해 능력에 따른 방편의 차이로 설명했다.

한편 호불 논서인 『현정론』에서는 불교에 대한 비판적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불교의 필요성과 가치를 주장했다. 불교가 충과 효로 상징되는 윤리 문제에서 본연의 역할을 수행해 왔고 유교와 불교가 근본 원리에서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저술로는 『현정론』 외에도 선승의 면모가 드러난 『함허당득통화상어록(涵虛堂得通和尙語錄)』 1권과 『선종영가집과주설의(禪宗永嘉集科註說誼)』 2권이 있고, 경전에 대해 해설을 붙인 『금강경오가해설의』 2권, 『금강경윤관(金剛經綸貫)』 1권, 『원각경설의(圓覺經說誼)』 3권이 현존한다. 또 전해지지는 않지만 『반야참문(般若懺文)』 1권을 지었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기화는 당시 불교계를 주도했던 나옹계의 주류였고 억불 정책의 시행 속에서 세력을 이어가면서 선과 교의 불교 전통을 계승하고자 했다. 입적한 봉암사에 비가 세워져 있고 가평 현등사(懸燈寺)에 탑이 있다.

참고문헌

원전

『함허당득통화상어록(涵虛堂得通和尙語錄)』
『현정론(顯正論)』

단행본

김용태, 『조선후기 불교사 연구』 (신구문화사, 2010)
이능화,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신문관, 1918)
다카하시 도루(高橋亨), 『이조불교(李朝佛敎)』 (보문관(寶文館), 1929)

논문

김용태, 「조선시대 불교의 유불공존 모색과 시대성의 추구」(『조선시대사학보』 49, 조선시대사학회, 2009)
박해당, 『기화의 불교사상 연구』(서울대 철학과 박사논문, 1996)
집필자
김용태(동국대학교 교수, 지역불교 및 불교사 연구(조선시대 불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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