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산성 ()

건축
유적
문화재
경기도 김포시 문수산에 있는 조선 후기 산성.
이칭
이칭
김포 문수산성
유적
건립 시기
조선 후기
관련 국가
조선
둘레
6.2km
면적
288,018㎡
소재지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포내리 산36-1번지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64년 8월 29일 지정)
소재지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포내리 산36-1번지
내용 요약

문수산성은 경기도 김포시 문수산에 있는 조선 후기 산성이다. 1694년(숙종 20)에 왕실 보장처 강화도의 방비를 위해 쌓았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과 전투가 벌어진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문수산 정상부에서는 삼국~통일신라시대에 쌓이고 운영된 성벽이 발굴되어 조선시대 이전부터 이곳이 군사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정의
경기도 김포시 문수산에 있는 조선 후기 산성.
건립 경위

문수산성은 왕실의 보장처인 강화도 방어를 위해 1694년(숙종 20)에 주18을 동원하여 쌓은 것이다. 효종~ 숙종 재위 기간 동안 강화도 연안을 따라 다수의 진(鎭) · 보(堡)를 배치하였고, 이후 주1와 외성을 차례로 쌓아 섬의 방비를 강화하였다. 여기에 병자호란 당시 강화 주7 건너편이 청군의 강화도 공격에 발판이 되었던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주8에 산성을 쌓아 내륙으로부터 강화로 진입하는 것을 차단하는 관문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1718년(숙종 44)에 산성 내에 문수진(文殊鎭)을 설치하였다. 이후 영조~ 순조 재위 기간 동안에 여러 차례 무너진 성벽, 성문 그리고 문루를 주2 및 보수하였다. 1866년(고종 3)에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부를 함락하자 순무초관(巡撫哨官) 한성근(韓聖根)이 지휘하는 조선군 50여 명이 문수산성에 진입하여 내륙 방향으로 침공에 대비하였으나 남문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하여 퇴각하였다. 이때 성내 민가와 남문 및 주변 성벽이 파괴되었다. 병인양요 직후 산성을 중건하였으나 이후 해안 쪽 성벽과 문루가 파괴되면서 원형을 잃었다.

변천

문수산성은 1964년 8월 29일 사적 제139호로 지정되었다. 2000년대 이후 파괴되었던 북문과 남문, 장대지가 복원되었고 성벽에 대한 보수가 최근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2011년 문수산성에서 김포 문수산성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발굴 경위 및 결과

문수산성은 1995년부터 2021년까지 9차례에 걸쳐 시 ·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멸실된 산성 서벽 구간과 문지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져 성벽의 축조 기법과 서문 및 아문지가 확인되었다.

정상부에 위치한 장대지도 발굴 후 복원이 이루어졌다. 장대지 남쪽 아래 지점에서는 삼국시대 성벽과 추정 치(雉)가 확인되었는데 산 정상부를 따라 둘레 약 300m의 테뫼식 산성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삼국시대 성벽은 바른 층 쌓기로 쌓았으며 대체적으로 높이가 낮은 외벽을 내벽 높이까지 쌓아 올린 뒤 내 · 외벽을 동시에 쌓았다. 출토 유물로 보아 이 테뫼식 산성은 삼국~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지고 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형태 및 특징

문수산성은 문수산의 남북 방향으로 형성된 주10과 여기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2개의 가지 능선, 서쪽 해안선을 따라 성벽이 만들어졌다. 성 안쪽으로 동서 방향으로 뻗은 능선과 이를 기준으로 남북으로 형성된 2개의 계곡을 감싸는 고로봉식 산성이다. 둘레는 약 6.2km이다.

성벽은 전 구간이 석축으로 되어 있는데 이 중 강화 해협과 접해 있는 서벽은 남아 있지 않다. 능선 구간의 성벽은 내탁식으로 만들어졌고 유실된 서쪽 구간 중 문지 주변은 주13 방식으로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동 · 남 · 북 벽은 암반을 주19 수평을 맞춘 뒤 주4을 놓고 그 위에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거친 성돌을 주3로 축조하였다. 성돌은 대체로 문수산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주14이 사용되었다. 일부 구간에는 주15이 남아 있으며 성돌에 축성 담당 및 축성 구간을 표기한 명문석이 여러 개 확인되었다.

산성에는 서 · 남 · 북 3개의 대문과 소규모 출입 시설인 아문(亞門) 4개소가 있었다. 대문 가운데 남문과 북문이 복원 정비되어 있고 서문(공해루)은 멸실되었다. 서문지 앞에는 문수산성과 강화 진해루 사이를 잇던 주16 나루 선착장 석축로가 남아 있다. 아문은 능선 구간 성벽에 2개소가 남아 있는데 이 중 남아문의 성내는 주5이며 바깥쪽은 주17이다. 이밖에 남벽에 용도(甬道)가 3곳 있다.

문수산 정상에는 주6으로 성벽을 축조한 둘레 약 70m의 원형 장대지가 복원되어 있다. 성내에는 문수산의 명칭이 유래된 것으로 전하는 문수사(文殊寺)가 자리한다.

의의 및 평가

문수산성은 돈대, 강화외성, 강화산성과 함께 강화도 방비를 위한 주요 군사 시설 가운데 하나이며,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과 전투가 벌어졌던 역사적 현장이다. 문수산 정상부에는 삼국시대 성벽이 발굴되어 조선시대 이전부터 문수산이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원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여지도서(輿地圖書)』

단행본

『김포시사 1 역사』(김포시사편찬위원회, 2011)
『김포 문수산성 삼국시대 추정 성벽지 문화재 발굴조사보고서』(고려문화재연구원, 2017)
『김포 문수산성 서측성벽 Ⅰ』(국토문화재연구원, 2022)
『한국고고학전문사전- 성곽편』(국립문화재연구소, 2012)

인터넷 자료

국가문화유산포털(http://www.heritage.go.kr)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https://portal.nrich.go.kr)
주석
주1

평지보다 높직하게 두드러진 평평한 땅. 우리말샘

주2

집이나 다리, 방죽 따위의 헐어진 곳을 고쳐 짓거나 보수함. 우리말샘

주3

크기가 다른 돌을 줄눈을 맞추지 아니하고 불규칙하게 쌓는 일. 우리말샘

주4

건축물이나 비석 따위의 기초로 쌓는 돌. 우리말샘

주5

네모반듯한 모양. 우리말샘

주6

구조물의 기초에 쓰이는 깬돌. 1개의 중량이 10~100kg로 여러 종류가 있다. 우리말샘

주7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에 있는 마을. 고려 23대 고종 때에 몽골군이 침입하자, 집권자였던 최우가 조정을 이끌고 피란한 곳으로, 육지와 거리가 가까워 군사의 갑옷만 벗어 쌓아도 건널 수 있다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우리말샘

주8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에 있는 산. 서쪽에 산지 아래로 문수사와 문수산 산림욕장이 자리하고 있으며, 등산로가 잘 조성되어 있어 등산객이 많이 찾는다. 높이는 376미터. 우리말샘

주9

성곽의 축조지형이 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산의 7-8부 능선을 따라 거의 수평되게 한 바퀴 둘러 쌓은 것. 역사용어시소

주10

산등성이를 따라 죽 이어진 선들 가운데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선. 우리말샘

주11

고구려에서 많이 축조된 산성의 형식으로 안에 골짜기와 평지를 가지면 주위의 산봉우리와 골짜기를 연결하여 둘러막아 쌓은 산성. 역사용어시소

주12

성벽을 쌓을 때 속을 다지는 일. 또는 성벽 안에 목책(木柵) 등을 세워 방비함. 한국고전용어사전

주13

성을 쌓을 때, 중간에 흙이나 돌을 넣고 안팎에서 돌을 쌓는 일. 우리말샘

주14

퇴적암의 하나. 크기가 2mm 이상인 자갈 사이에 모래나 진흙 따위가 채워져 굳은 것으로, 자갈이 전체의 30% 이상이어야 한다. 우리말샘

주15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여기에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하거나 한다. 우리말샘

주16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에 있는 마을. 고려 23대 고종 때에 몽골군이 침입하자, 집권자였던 최우가 조정을 이끌고 피란한 곳으로, 육지와 거리가 가까워 군사의 갑옷만 벗어 쌓아도 건널 수 있다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우리말샘

주17

문의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문. 우리말샘

주18

조선 시대에 둔 세 군영.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을 이른다. 우리말샘

주19

땅을 반반하고 고르게 만들다. 우리말샘

집필자
이희인(인천시립박물관 학예연구관)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