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사인 ()

민간신앙
인물
해방 이후 198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주칠머리당굿」 전승자로 지정된 기예능보유자.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28년
사망 연도
1990년
본관
순흥(順興)
출생지
제주
정의
해방 이후 198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주칠머리당굿」 전승자로 지정된 기예능보유자.
개설

보유종목은 무가(巫歌)이며, 1980년에 인정되었다. 본관은 순흥(順興). 제주 출생.

아버지는 21대 세습무인 임생(任生)이다. 그 무계(巫系) 세습을 보면 안씨 집안은 본래부터 무가(巫家)가 아니었다. 21대조가 제주로 낙향하여 애월읍 어음리에 정착, 농업으로 생계를 꾸리기 시작하였고, 12대조가 애월읍 수산리로 이주하였으며 증조부가 제주시 오라동으로 이주하였는데, 이 증조부가 구좌읍 하도리 19대째 세습무계 집안의 딸 고씨(高氏)의 미모에 반하여 혼인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증조부는 일생 무업을 하지 않았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그 어머니의 무업을 계승하여 심방(무당)이 되었고, 다시 부모에게 이어져 결국 21대 세습무계 집안이 된 것이다.

이러한 무계 집안에 태어난 그는 부모의 굿판을 따라다니며 성장하였고, 제주북국민학교를 졸업, 동교 고등과 2년을 수료한 뒤, 제주군사비행장 군속으로 근무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19세 때 아버지가 죽으면서 멩두, 곧 심방의 수호신의 인계를 걱정하므로 이를 이어받을 것을 약속하고 굿을 시작하였다. 23세에 입무의례인 신굿을 하여 정식 심방인 하신충이 되어 제주시 용담동의 본향당인 ᄀᆞ스락당의 매인 심방(당에 소속된 무당)이 되었는데, 목소리가 좋고 춤이 고와 심방으로서 명성이 높았다.

36세에 다시 신굿을 하여 중신충이 되었고, 49세에 다시 신굿을 하여 심방의 최고위인 상신충에 올랐다. 무슨 굿이든 못하는 굿이 없어 제주시일대의 굿을 맡아 하였고, 또한 굿의 예술화에도 기여하였다. 1966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놀이굿인 세경놀이를, 1967년 영감놀이를, 1968년 영등굿놀이를 지도, 출연하여 공보부장관상·대통령상·국무총리상을 각각 받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자신의 굿기능이 학술적·예술적 가치가 있음을 인식하여 학자들의 조사, 채록에 협조하여 무가를 문자화하였다. 198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주 칠머리당굿 기예능 보유자가 된 이후 이 당굿의 보존회를 조직, 회장이 되어 소멸 위기의 당굿을 부흥, 보존하는 데 노력하였으며, 여러 전수생에게 그 기능을 가르쳐 전수하다가 사망하였다.

심방이 천시되고 굿이 미신타파의 대상이 되던 환경에서 스스로 심방임을 자부하며, 굿을 지키고 알리고 가르친 제주의 대표적 심방이다.

집필자
현용준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