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6년 3월에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1446)가 승하하자,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은 산릉을 동분이실(同墳異室)로 만들겠다고 결정한다. 동분이실이란, 하나의 봉분 아래에 2개의 실(室)을 구성한 합장릉을 말한다. 터는 태종(太宗, 13671422, 재위 14001418)과 원경왕후(元敬王后, 13651420)가 묻힌 헌릉(獻陵)의 서쪽 언덕으로 정하였다.
가운데 사잇돌을 세워 두 돌방의 칸막이 벽으로 하고, 북쪽에 북우석(北隅石)을 세우고 동쪽과 서쪽에 벽체를 세워 덮개돌을 덮어서 2개의 돌방을 만들었다. 서실(西室)은 세종의 수실(壽室)이며, 동실(東室)은 왕후의 돌방이다. 돌방의 남쪽에는 남문의 문짝인 두 짝의 문비석(門扉石)으로 입구를 막았다. 돌방의 외벽에는 석회와 모래 · 황토를 섞어서 4자 두께로 쌓아 회격을 만들어서 밀실하게 하고, 그 바깥에 5치 두께로 숯을 쌓아 올렸다.
7월 19일에 소헌왕후의 국장이 이루어지자 동쪽 돌방이 밀폐되었다. 1450년 2월 17일에 세종이 영응대군(永膺大君, 1434~1467)의 집에서 승하하자 예비해 둔 수실에 안장되면서 별도의 산릉 공역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6월 12일에 세종의 재궁이 서쪽 돌방에 안치되었다.
1467년(세조 13) 4월 5일에 영릉의 터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천릉할 것을 논의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1468년에 영릉 옮길 곳을 모색하여 1469년에 여흥[지금의 경기도 여주]로 옮겼다.
새 능을 조성할 때 세조의 광릉을 전례로 삼아 현궁(玄宮)을 회다짐으로 조성하고, 병풍석(屛風石)을 설치하지 않고 난간석(欄干石)만을 세웠다. 초장지(初葬地)에 남겨진 돌거리는 옮기기 어려웠기 때문에 땅에 묻고, 정자각(丁字閣) 등의 건물도 옮겨 짓지 않고 새로 조성하였다. 1469년 3월 6일에 세종과 소헌왕후의 재궁이 여흥으로 옮겨졌다.
천릉하여 여흥에 건립된 영릉은 회다짐으로 만든 합장릉으로 봉분이 하나로 합쳐지고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을 둘렀다. 난간석 밖으로 양석(羊石)과 호석(虎石)을 각 네 마리씩 번갈아가며 배치하였다.
능은 계체석(階砌石)을 3단으로 배열하였는데, 상단에는 혼유석(魂遊石)이 두 개가 놓이고 양쪽으로 망주석(望柱石)이 한 쌍 세워졌으며, 중계에는 장명등(長明燈)을 중앙에 배치하고 양쪽에 문석인(文石人)과 석마(石馬)가 마주 보게 배치되었으며, 하계에는 무석인(武石人)과 석마가 마주하여 배치되었다.
능 아래로 36보 지점에 정자각이 있고 정자각 서북쪽에 망료위(望燎位)가 있으며, 동쪽으로 17보 지점에 표석이 세워졌다. 소실되었던 수라간(水剌間)과 수복방(守僕房)은 1970년대에 복원하였으며, 천릉하면서 땅속에 묻었던 신도비(神道碑)는 1974년 3월에 발굴하여 세종대왕기념관 야외에서 전시하고 있다.
여주영릉은 세종이 살아 있을 때 소헌왕후의 산릉을 만들면서 자신의 수실을 서쪽에 미리 만들어 두 돌방이 사잇돌을 사이에 두고 연결되는 합장릉 제도였다. 또 대형 석재로 돌방을 만든 구조체 외곽에 삼물회와 숯을 쌓아 기존 돌방 구조에 견고함을 더하였다.
그러나 천릉으로 인해 여주영릉의 돌방은 소실되고 현재는 회격으로 남아 있다. 다만, 『 세종실록(世宗實錄)』에 능실 제도와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흉례(凶禮)」 치장조에 기록이 남아 그 구조를 추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