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영릉 ( )

조선시대사
유적
문화재
경기도 여주시에 있는 조선 제4대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합장릉.
이칭
약칭
영릉(英陵)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건립 시기
조선 전기
관련 국가
조선
관련 인물
세종|소헌왕후
소재지
경기도 여주시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70년 05월 27일 지정)
소재지
경기도 여주시 영릉로 269-10 (능서면) 여주 영릉과 영릉
내용 요약

여주영릉(驪州英陵)은 경기도 여주시에 있는 조선 제4대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합장릉이다. 1446년 헌릉의 서쪽에 돌방과 병풍석을 갖추어 건립되었으며, 『국조오례의』 「흉례」의 치장조에 따라 조선 석실 제도의 모범이 되었으나, 1469에 여주로 천릉하면서 광릉의 제도에 따라 삼물회(황토, 고운모래, 석회)로 회격현궁을 만들고 난간석만을 둘렀다. 왕이 살아 있을때, 왕후의 국장을 위하여 산릉을 조성하면서 추후에 안치될 왕의 수실을 미리 만들었던 유일한 사례이다.

정의
경기도 여주시에 있는 조선 제4대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합장릉.
건립경위

1446년 3월에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1446)가 승하하자,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은 산릉을 동분이실(同墳異室)로 만들겠다고 결정한다. 동분이실이란, 하나의 봉분 아래에 2개의 실(室)을 구성한 합장릉을 말한다. 터는 태종(太宗, 1367~1422, 재위 1400~1418)과 원경왕후(元敬王后, 1365~1420)가 묻힌 헌릉(獻陵)의 서쪽 언덕으로 정하였다.

가운데 사잇돌을 세워 두 돌방의 칸막이 벽으로 하고, 북쪽에 북우석(北隅石)을 세우고 동쪽과 서쪽에 벽체를 세워 덮개돌을 덮어서 2개의 돌방을 만들었다. 서실(西室)은 세종의 주1이며, 동실(東室)은 왕후의 돌방이다. 돌방의 남쪽에는 남문의 문짝인 두 짝의 문비석(門扉石)으로 입구를 막았다. 돌방의 외벽에는 석회와 모래 · 황토를 섞어서 4자 두께로 쌓아 회격을 만들어서 밀실하게 하고, 그 바깥에 5치 두께로 숯을 쌓아 올렸다.

7월 19일에 소헌왕후의 국장이 이루어지자 동쪽 돌방이 밀폐되었다. 1450년 2월 17일에 세종이 영응대군(永膺大君, 1434~1467)의 집에서 승하하자 예비해 둔 수실에 안장되면서 별도의 산릉 공역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6월 12일에 세종의 재궁이 서쪽 돌방에 안치되었다.

변천

1467년(세조 13) 4월 5일에 영릉의 터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천릉할 것을 논의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1468년에 영릉 옮길 곳을 모색하여 1469년에 여흥[지금의 경기도 여주]로 옮겼다.

새 능을 조성할 때 세조의 광릉을 전례로 삼아 주2을 회다짐으로 조성하고, 주3을 설치하지 않고 난간석(欄干石)만을 세웠다. 초장지(初葬地)에 남겨진 돌거리는 옮기기 어려웠기 때문에 땅에 묻고, 주4 등의 건물도 옮겨 짓지 않고 새로 조성하였다. 1469년 3월 6일에 세종과 소헌왕후의 재궁이 여흥으로 옮겨졌다.

형태와 특징

천릉하여 여흥에 건립된 영릉은 회다짐으로 만든 합장릉으로 봉분이 하나로 합쳐지고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을 둘렀다. 난간석 밖으로 주5주6을 각 네 마리씩 번갈아가며 배치하였다.

능은 주7을 3단으로 배열하였는데, 상단에는 주8이 두 개가 놓이고 양쪽으로 주9이 한 쌍 세워졌으며, 중계에는 장명등(長明燈)을 중앙에 배치하고 양쪽에 주10주11가 마주 보게 배치되었으며, 하계에는 주12과 석마가 마주하여 배치되었다.

능 아래로 36보 지점에 정자각이 있고 정자각 서북쪽에 주13가 있으며, 동쪽으로 17보 지점에 표석이 세워졌다. 소실되었던 주14과 수복방(守僕房)은 1970년대에 복원하였으며, 천릉하면서 땅속에 묻었던 신도비(神道碑)는 1974년 3월에 발굴하여 세종대왕기념관 야외에서 전시하고 있다.

의의 및 평가

여주영릉은 세종이 살아 있을 때 소헌왕후의 산릉을 만들면서 자신의 수실을 서쪽에 미리 만들어 두 돌방이 사잇돌을 사이에 두고 연결되는 합장릉 제도였다. 또 대형 석재로 돌방을 만든 구조체 외곽에 삼물회와 숯을 쌓아 기존 돌방 구조에 견고함을 더하였다.

그러나 천릉으로 인해 여주영릉의 돌방은 소실되고 현재는 회격으로 남아 있다. 다만, 『 세종실록(世宗實錄)』에 능실 제도와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흉례(凶禮)」 치장조에 기록이 남아 그 구조를 추정할 수 있다.

참고문헌

원전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춘관통고(春官通考)』

단행본

『종합학술조사보고서-조선왕릉Ⅱ』(국립문화재연구소, 2011)

인터넷 자료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https://www.heritage.go.kr/)
위키실록사전 (http://dh.aks.ac.kr/sillokwiki)
주석
주1

살아 있을 때에 미리 만들어 놓은 무덤.    우리말샘

주2

임금의 관(棺)을 묻던 광중(壙中).    우리말샘

주3

능(陵)을 보호하기 위하여 능의 위쪽 둘레에 병풍처럼 둘러 세운 긴 네모꼴의 넓적한 돌. 겉에 12신(神)이나 꽃무늬 따위를 새긴다.    우리말샘

주4

왕릉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봉분 앞에 ‘丁’ 자 모양으로 지은 집.    우리말샘

주5

왕릉이나 무덤 앞에 세워 놓은, 돌로 만든 양 모양의 조각물.    우리말샘

주6

왕릉이나 큰 무덤 주위에 돌로 만들어 세운 호랑이.    우리말샘

주7

무덤 앞에 편평하게 만들어 놓은 장대석.    우리말샘

주8

넋이 나와 놀도록 한 돌이라는 뜻으로, 상석(床石)과 무덤 사이에 놓는 직사각형의 돌을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9

무덤 앞의 양쪽에 세우는 한 쌍의 돌기둥. 돌 받침 위에 여덟모 진 기둥을 세우고 맨 꼭대기에 둥근 대가리를 얹는다.    우리말샘

주10

능(陵) 앞에 세우는 문관(文官)의 형상으로 깎아 만든 돌.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복두(幞頭)나 금관을 쓰며 손에는 홀(笏)을 든 공복(公服) 차림을 하고 있다.    우리말샘

주11

왕릉 따위의 앞에 돌로 만들어 세워 놓은 말.    우리말샘

주12

능(陵) 앞에 세우는 무관(武官) 형상으로 만든 돌. 능 앞 셋째 줄의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하나씩 세운다.    우리말샘

주13

임금이 능에서 제사를 지내고 축문(祝文)을 태우던 곳.    우리말샘

주14

임금의 진지를 짓던 주방.    우리말샘

집필자
신지혜(건축문헌고고스튜디오 연구원)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