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릉 ()

조선시대사
유적
문화재
조선 제11대 국왕 중종의 비 단경왕후 거창신씨의 능.
이칭
이칭
양주 온릉(楊州 溫陵)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건립 시기
조선 전기(1739)
관련 국가
조선
관련 인물
단경왕후|중종
소재지
경기도 양주시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70년 05월 26일 지정)
소재지
경기 양주시 장흥면 호국로 255-41 (일영리)
내용 요약

온릉(溫陵)은 조선 제11대 국왕 중종의 비 단경왕후 거창신씨의 능이다. 단경왕후는 폐위된 뒤 묘소가 친정 선산에 조성되었으며, 1739년 복위되면서 왕릉으로 조성되었다. 온릉은 정순왕후 사릉 돌거리의 수량과 크기를 따랐으며, 이 돌거리 제작 전반을 별간역(別看役) 최천약(崔天若)이 지휘하였다. 사적 ‘양주 온릉’으로 지정되어 있다.

정의
조선 제11대 국왕 중종의 비 단경왕후 거창신씨의 능.
건립경위

단경왕후(端敬王后) 거창신씨(居昌愼氏, 1487~1557)는 1499년 진성대군(晉城大君)과 혼인해 부부인(府夫人)에 봉해졌으며, 1506년 진성대군이 중종(中宗, 1488~1544, 재위 1506~1544)으로 즉위하면서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단경왕후의 고모가 연산군(燕山君, 1476~1506, 재위 1494~1506)의 부인이며, 아버지 신수근(愼守勤, 1450~1506)이 반정에 반대해 죽임을 당해 왕비 책봉 7일 만에 폐위되었다. 단경왕후는 1739년에서야 복위되고 묘소는 온릉(溫陵)으로 봉릉되어 왕릉의 모습이 갖추어졌다.

변천

단경왕후의 묘소는 그의 친정 거창신씨의 세장지(世葬地)에 조성되었다. 석물은 ‘폐비신씨지묘(廢妃愼氏之墓)’라고 새겨진 표석, 주1 1쌍, 주2 1쌍, 상돌 1좌, 장명등(長明燈) 1좌가 있었다.

온릉을 봉릉하면서 사릉(思陵), 정릉(貞陵)의 예에 따라 주3과 난간석(欄干石)은 설치하지 않고, 봉분의 크기는 사릉의 척수를 따르게 하였다. 돌거리는 사릉의 수량과 크기를 따라 제작하였으며, 돌거리 제작 전반은 주4 최천약(崔天若)이 담당하였다.

형태와 특징

온릉은 병풍석과 난간석이 없는 단릉(單陵) 봉분 주변에 주5주6, 주7이 둘러져 있다. 봉분 앞에 주8과 장명등, 좌우로 망주석과 문석인, 주9가 배치되어 있다. 능강 아래에는 주10, 비각(碑刻), 주11이 있으며, 주12과 수복방(守僕房)은 남아 있지 않다.

온릉 주13은 온릉 입구 덕양대로 우측이 일부 흔적만 남아 있으며, 현재 능역 안에 있는 한옥 건물은 1976년 이후 재실의 일부를 옮겨 놓은 것이다.

금석문

비각 안에 있는 온릉 표석은 1807년에 건립한 것으로 앞면의 전서(篆書)는 조윤대(曺允大)가 썼으며, 뒷면의 주14서영보(徐榮輔)가 쓴 것이다.

의의 및 평가

단경왕후 온릉은 1739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돌거리들이 갖추어졌으며, 이 작품들은 18세기의 유명한 조각가이자 별간역인 최천약이 돌거리 제작 전반을 담당하였다. 그래서 문석인의 얼굴과 눈 표현 방법, 옷 앞자락이 살짝 접히는 모습은 이후 18세기 특징으로 자리하게 되며, 온릉 문석인은 그 기준이 되는 중요한 작품이다. 사적 정식 명칭은 ‘양주 온릉(楊州 溫陵)’이다.

참고문헌

원전

『춘관통고(春官通考)』
『〔단경왕후(端敬王后)〕온릉봉릉도감의궤(溫陵封陵都監儀軌』(1739)

단행본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Ⅲ』(국립문화재연구소, 2012)

논문

김민규, 「조선 18세기 조각가 최천약 연구」(『문화재』 46권 1호, 국립문화재연구소, 2013. 3)
주석
주1

능(陵) 앞에 세우는 문관(文官)의 형상으로 깎아 만든 돌.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복두(幞頭)나 금관을 쓰며 손에는 홀(笏)을 든 공복(公服) 차림을 하고 있다.    우리말샘

주2

무덤 앞의 양쪽에 세우는 한 쌍의 돌기둥. 돌 받침 위에 여덟모 진 기둥을 세우고 맨 꼭대기에 둥근 대가리를 얹는다.    우리말샘

주3

능(陵)을 보호하기 위하여 능의 위쪽 둘레에 병풍처럼 둘러 세운 긴 네모꼴의 넓적한 돌. 겉에 12신(神)이나 꽃무늬 따위를 새긴다.    우리말샘

주4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그것을 감독하던 임시 벼슬.    우리말샘

주5

왕릉이나 무덤 앞에 세워 놓은, 돌로 만든 양 모양의 조각물.    우리말샘

주6

왕릉이나 큰 무덤 주위에 돌로 만들어 세운 호랑이.    우리말샘

주7

능, 원, 묘 따위의 무덤 뒤에 둘러쌓은 나지막한 담.    우리말샘

주8

넋이 나와 놀도록 한 돌이라는 뜻으로, 상석(床石)과 무덤 사이에 놓는 직사각형의 돌을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9

왕릉 따위의 앞에 돌로 만들어 세워 놓은 말.    우리말샘

주10

왕릉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봉분 앞에 ‘丁’ 자 모양으로 지은 집.    우리말샘

주11

능(陵), 원(園), 묘(廟), 대궐, 관아(官衙) 따위의 정면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문(門). 둥근기둥 두 개를 세우고 지붕 없이 붉은 살을 세워서 죽 박는다.    우리말샘

주12

임금의 진지를 짓던 주방.    우리말샘

주13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집.    우리말샘

주14

비석의 뒷면에 새긴 글.    우리말샘

집필자
김민규(동국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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