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鎭州)이며, 추밀원사(樞密院使) 채인규(蔡仁揆)의 사위이다.
원종 때 통역관[譯語]으로서 여러 번 승진하여 낭장(郎將)이 되었으며, 1260년(원종 1) 1월 몽골에 사행(使行)하였다가 백주(白州) 소부별감(蘇復別監) 김수제(金守磾)와 함께 투항하였다. 체발(剃髮)을 하고 야속달(也速達)의 영(營)에 머무르면서 “고려는 개경으로 환도하지 않고, 장차 제주로 다시 도읍을 옮겨 몽골에 대항할 것이다.”라고 고려를 모함하여 강도정부(江都政府)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1268년 11월 대일초유(對日招諭)를 위하여 고려에 온 몽골사신 흑적(黑的)을 따라 귀국하였고, 이듬해 7월 몽골사신 우루대(于婁大)와 함께 고려에 돌아왔다.
1270년 5월 무신집권자 임유무(林惟茂)가 제거되고, 임연(林衍)·임유인(林惟裀)의 가속을 잡아 원도(元都)에 보낼 때, 조정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법망을 빠져나와 홀로 머물고 있던 임유인의 처 채씨(蔡氏)를 취하여 결혼하였다가 1273년 11월 원의 중서성에서 다루가치[達魯花赤]에게 보낸 공문에 의해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