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아버지는 문하찬성사 유연(柳淵)이다.
공민왕 때 궁중에서 자랐으며, 20세에 벼슬길에 올라 창왕 때에 문하부밀직사(門下府密直使)가 되었다. 1390년(공양왕 2)에는 판자혜부사(判慈惠府使)로, 이듬해에는 동북면도절제사가 되었다.
1392년 동북면도절제사 겸 화령부윤(和寧府尹) 역임 시 왜구를 잡는 데 공을 세웠다. 1401년(태종 1)에 중군총제가 되었고, 이듬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4년 경상도도절제사 및 경상도병마절제사로 있을 때도 왜구 퇴치에 큰 공을 세웠다.
1407년 공조판서·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성절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9년 호조판서·중군도총제 등을 역임하고, 형조판서가 되었다. 당시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 형제의 사건관련자를 국문할 때 형관으로서 엄하게 하지 않았다는 문책을 당하여 파직되어 외방(外方)으로 귀양갔다.
이듬해 과전(科田)은 환급받게 되었다. 성품이 너그러우면서 강직하였으며, 문관으로 무관도 겸하면서 특히 왜구 퇴치에 큰 공을 세웠다. 시호는 양정(良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