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 초명은 윤동성(尹東星). 자도 처음에 유문(孺文)이었다가 유진(孺進)으로 개명. 윤해거(尹海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부(尹扶)이다. 아버지는 윤언교(尹彦敎)이다.
1746년(영조 22) 진사로 춘당대시에서 을과로 급제, 문한관(文翰官)을 거쳐 1755년에 문학(文學)이 되고 이어 수찬(修撰)·부교리·사헌부집의·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757년 암행어사로 강원도 지방을 시찰하고 돌아와 민폐의 시정과 흉년으로 인한 공세(貢稅)의 감면을 주청, 왕의 윤허를 받았다.
그 뒤 응교(應敎)·검상·부응교·부수찬·부교리·보덕 등을 거쳐 성균관대사성·광주부윤(廣州府尹)을 역임하고 충청도관찰사로 승진하였다. 마침 국기(國忌) 중에 연악(宴樂)을 개최하다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나, 왕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다시 승지로 소환, 대사성·이조참의가 되었고, 1770년 전라도관찰사로 나가 대동미(大同米)·대동포(大同布)의 수송에 따른 조선(漕船)의 불합리한 점을 시정하여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할아버지 윤부(尹扶)의 이름을 피하여 부안현(扶安縣)을 희안현(喜安縣)으로 바꾸었다가 사헌부의 극렬한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그 뒤 도승지·대사성·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