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자방(子方), 호는 만사(晩沙). 수찬(修撰) 이세범(李世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천현감(伊川縣監) 이국주(李國柱)이다. 아버지는 창성부사 이상민(李尙閔)이며, 어머니는 전주 이씨(全州李氏)로 북청판관 이학수(李鶴壽)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작은아버지인 이호민(李好閔)으로부터 공부를 배웠다. 1616년(광해군 8) 진사가 되었으나, 당시 폐모론이 일어나자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향리 음성에서 한 때 농사를 지었다. 1619년 선무랑으로 정시 문과에 장원 급제해 성균관전적이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공조·형조의 좌랑을 지내고, 예조좌랑 때 시관을 잘 살피지 않은 실수로 파직되었다. 1624년에 병조좌랑을 거쳐 지평·정언·헌납과 성균관직강을 역임하고 병조정랑이 되어 관동에 호패군적어사(號牌軍籍御史)로 파견된 적이 있다. 정묘호란 후에는 평안도어사로 나가 군졸과 백성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활약하였다.
이어 시강원문학, 1628년에는 홍문관수찬이 되었으나 병으로 사양하면서, 가뭄으로 인한 응지만언소(應旨萬言疏)를 올렸다. 다시 사서·수찬과 홍문관교리를 지내고, 영남 지방에 암행어사로 나가 엄정히 일을 처리하였다.
이에 다시 헌납을 거쳐 1631년 교리가 되었으나, 인조의 사친(私親)인 정원군(定遠君) 추숭(追崇)에 있어서 고례(古禮)에 합당하지 못한 일이 있어 유배되었다가 다시 서반(西班)에 봉직하였다. 뒤에 통례원상례(通禮院相禮)·군기시정(軍器寺正)·시강원보덕을 지낸 뒤 사인·필선·장령·사성·응교·집의·사간을 거치면서 바른 언관으로 이름을 떨쳤다.
호남의 체찰사로 나갔고, 홍주목사일 때에는 양전(量田) 업무를 잘 처리하였다. 병자호란 때에는 군량을 조달하고 군진(軍鎭)을 수습하는 데에 진력하였다. 난이 끝난 뒤 유장(儒將)이라고 칭송을 받았으며, 1638년에는 호조참의 겸 승문원비변사부제조가 되었다.
이듬해 사간·승지·이조참의를 거쳐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행호군·동지성균(同知成均)·혜민제조(惠民提調)가 되었다. 당대의 문사 이안눌(李安訥)과 친교를 맺었으며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