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길보(吉甫). 증참찬 이천(李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감찰 이원수(李原秀)이다. 아버지는 이우(李瑀)이며, 어머니는 덕산황씨(德山黃氏)로 진사 황기로(黃耆老)의 딸이다. 이이(李珥)의 조카이다.
1606년(선조 39)에 진사가 되고, 1615년(광해군 7) 문과 회시에 통과되었으나 과거시험의 공정성에 회의를 품고 전시에 응하지 아니하였다. 서인계열의 인물로 광해군의 폐모론에 반대하여, 향리인 선산군에 돌아가서 야인생활을 하였다. 그 때 동지들과 의논하여 길재(吉再)의 사우(祠宇)를 낙동강 상류지역으로 이전하였다.
인조반정 이후에 황산도찰방으로 임명되어, 인심을 수습하고 황폐되었던 역로(驛路)를 완전히 복구하여 상을 받은 바 있고, 또 중림도찰방(重林道察訪)이 되어 역시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그 뒤 제용감직장(濟用監直長)·예빈시별좌·사헌부감찰을 거쳐 문경현감으로 나가서 치적을 남겼다.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향인들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이 되었으며, 문경인들도 이경절을 도와서 그 지역을 잘 지켰다. 그러나 삼전도화약(三田渡和約)의 소식을 전하여듣고, 고향에 돌아가서 관계에는 나오지 않고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그림과 글씨 및 가야금에 능하였다. 1651년(효종 2)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