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하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후기 훈련대장, 총융사, 지훈련원사 등을 역임한 무신.
이칭
하경(夏卿)
시호
정희(貞僖)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46년(인조 24)
사망 연도
1718년(숙종 44)
본관
한산(韓山,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
주요 관직
삼도수군통제사|한성부좌윤|형조참판|우포도대장|훈련대장|총융사|지훈련원사
정의
조선후기 훈련대장, 총융사, 지훈련원사 등을 역임한 무신.
개설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하경(夏卿). 아버지는 어영대장 이여발(李汝發)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장가(將家)의 아들로서 문음(門蔭)으로 입사해, 내외의 여러 무관직을 역임하고 1694년(숙종 20) 총융사(摠戎使)에 발탁되었다.

이 때 문수산성(文殊山城)의 축조가 완성되어 통진현을 이곳으로 옮기려 하자 이의 부당성을 주장하였다. 또 수원·남양·장단 지역의 군정 수비(軍政修備)가 크게 해이해지자, 개선책으로 무신을 수령으로 파견하자고 건의해 남양과 장단에는 문무교체(文武交替)가 되도록 하였다. 다음 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고, 1697년 한성군(韓城君)에 봉해졌다.

이어서 한성부좌윤·어영대장을 거쳐 1701년 훈련대장에 발탁되자, 대간이 인망이 가볍고 물정이 어둡다는 이유로 교체를 요구했으나, 왕이 누대에 걸친 장가의 아들이라 해 허락하지 않았다.

곧 형조참판·병조참판 등을 거쳐 다시 훈련대장이 되었는데, 1703년 병조판서 이유(李濡)가 국방비의 절감을 위해 금위영(禁衛營)의 폐지를 주장하자 적극 반대해 저지시켰다.

이어서 우포도대장을 거쳐 훈련대장이 되어 도성의 취약점을 보완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 뒤 병조판서 윤세기(尹世紀)와 병조에 관한 사무를 논하다가 대립해, 두 사람 모두 추고(推考: 심문을 하고 징계함), 파직되었다.

다시 훈련대장이 되어 도성의 보완을 재차 건의해 7,620보(步)에 걸친 성곽축조사업을 추진했으나, 재용(財用)을 고갈시켰다는 명목으로 사간원의 맹렬한 탄핵을 받았다.

1709년 왕명을 받들어 강도(江都)를 순시하고 돌아와, 포도대장·총융사를 거쳐 1716년 지훈련원사(知訓鍊院事), 다음 해 유도대장(留都大將)에 임명되었다. 평소 새로운 도법(刀法)의 채용과 새 전차(戰車)의 제작에 힘을 기울였다.

사신(史臣)은 이기하에 대해 중외(中外)에 출입하면서 큰 성적(聲績)을 내지는 못했지만, 숙종의 총애를 받아 20여 년이나 군대통수권을 장악한 복장(福將: 지혜와 꾀는 적지만 싸움에서는 이기는 장수)이라고 평했다. 시호는 정희(貞僖)이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집필자
장동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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