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평안도 창성의 토병(土兵)으로 참전하여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이항복(李恒福)은 이남을 가리켜 가장 사납고 용맹스러워 여러 장수가 어깨를 겨룰 수 없었다고 평가하였는데, 군공으로 연풍현감을 제수받았다.
1595년 사간원은 이남이 궁마(弓馬)의 술(術)은 있으나 인물이 용렬하고 문자조차 알지 못하므로 연풍현감으로 부적당하다 하여 개체(改遞)를 주장하였지만, 선조는 유공자라 하여 체직(遞職)할 수 없다고 하였으며, 다시 대간의 탄핵이 계속되었지만 체직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