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0년(원종 1) 4월 재추(재추)와 공신들이 객관에서 몽고사신 형절(荊節)에게 잔치를 베풀었을 때, 형절의 관반(館伴)이었던 그는 형절과 시를 주고 받고 하였다. 1263년 12월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에 임용되었고, 1269년(원종 10) 국좌좨주(國子祭酒)로서 세자(충렬왕) 및 대사성 김구(金坵)와 창화(唱和)한 용루집(龍樓集)을 남겼다. 김구(金坵, 초명 百鎰)과 함께 ‘문성(文星)’으로 칭해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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