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장릉 ( )

조선시대사
유적
문화재
조선 제16대 국왕인 인조와 인열왕후 청주한씨의 합장 단릉.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단릉
건립 시기
조선 후기
관련 국가
조선
관련 인물
인조|인열왕후
소재지
경기도 파주시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70년 05월 26일 지정)
소재지
경기도 파주시 장릉로 90 (탄현면)
내용 요약

파주 장릉(坡州 長陵)은 조선 제16대 국왕인 인조와 인열왕후 청주한씨의 합장 단릉이다. 처음에는 파주 북운천리에 조성되었으나 1731년 지금의 자리로 천릉되었다. 이때 쌍릉에서 단릉으로 바뀌어 병풍석을 새로 제작하였으며, 다른 돌거리들은 대부분 옮겨서 사용하였다. 1970년 5월 26일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정의
조선 제16대 국왕인 인조와 인열왕후 청주한씨의 합장 단릉.
건립경위

파주 장릉은 1636년 왕후릉이 파주 북운천리(지금의 파주시 문산읍 운천2리 일대)에 조성되었다. 1649년 인조(仁祖, 1595~1649, 재위 1623~1649)가 합장되었으나 풍수 관련 문제와 돌거리들이 벌어지고 뱀과 벌레들이 나오자 1731년 현재의 자리로 천릉되었다.

변천

천릉 이전의 파주 장릉은 인조와 왕후릉이 쌍릉으로 주1이 둘러있던 형태였다. 현재의 파주 장릉은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과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1446) 영릉(英陵)을 따라 합장릉 제도를 따르게 되었는데, 병풍석의 규모가 커지면서 병풍석은 새로 제작하였다. 이때 병풍석의 면석(面石)에 조각되던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은 모란으로 대체되었고, 주2의 채운(彩雲)은 연꽃으로 대체되었다.

형태와 특징

파주 장릉은 인조와 인열왕후(仁烈王后, 1549~1635) 합장의 봉분 주변에 주3, 주4, 주5, 주6, 장명등(長明燈), 주7주8, 주9가 건립되어 있다. 혼유석은 2좌가 설치되어 있는데 세종 영릉을 따랐기 때문이다. 돌거리 제작에 사용된 돌은 강화 매음도(煤音島, 지금의 석모도)에서 채취한 것을 사용하였다.

능강 아래에는 주10, 비각(碑刻)이 있으며, 주11과 수복방(守僕房)은 사라져 없어졌다. 파주 장릉 입구에는 주12이 남아 있으며, 안향청(安香廳)과 주13으로 추정되는 건물이 남아 있다.

금석문

파주 장릉 표석은 천릉하던 1731년에 건립되었으며, 주14은 남포오석(藍浦烏石)을 사저취용(私儲取用: 개인이 가지고 있는 것을 구입해 사용)한 것이다. 앞면의 주15홍현보(洪鉉輔, 1680~1740), 뒷면의 주16조정만(趙正萬, 1656~1739)이 썼다. 파주 장릉 표석은 조선왕릉 표석 중 뚜껑돌 아랫부분에 주17 등 건축 부재를 조각한 유일한 작품이다.

의의 및 평가

파주 장릉의 병풍석 설계 및 천릉 실무 전반은 주18 최천약(崔天若)이 담당하였다. 최천약은 국새 제작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파주 장릉의 천릉 이후 능묘 조영에도 능력을 인정받아 단경왕후(端敬王后, 1487~1557) 온릉(1739년), 의소세손(懿昭世孫, 1750~1752) 묘(1752년) 등의 조영을 지휘하였다. 최천약에 의해서 새롭게 제작된 파주 장릉 병풍석은 이후 제작되는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 현륭원(1789년) 병풍석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참고문헌

원전

『〔인조인열왕후〕천릉도감의궤』(1731)
『〔인조인열왕후〕장릉천릉시 산릉도감의궤』(1731)

단행본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Ⅴ』(국립문화재연구소, 2013)

논문

김민규, 「조선 왕릉 장명등 연구」(동국대학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09)
주석
주1

능(陵)을 보호하기 위하여 능의 위쪽 둘레에 병풍처럼 둘러 세운 긴 네모꼴의 넓적한 돌. 겉에 12신(神)이나 꽃무늬 따위를 새긴다.    우리말샘

주2

지대나 축대 등의 귀퉁이에 쌓는 돌.    우리말샘

주3

왕릉이나 무덤 앞에 세워 놓은, 돌로 만든 양 모양의 조각물.    우리말샘

주4

왕릉이나 큰 무덤 주위에 돌로 만들어 세운 호랑이.    우리말샘

주5

무덤 앞의 양쪽에 세우는 한 쌍의 돌기둥. 돌 받침 위에 여덟모 진 기둥을 세우고 맨 꼭대기에 둥근 대가리를 얹는다.    우리말샘

주6

넋이 나와 놀도록 한 돌이라는 뜻으로, 상석(床石)과 무덤 사이에 놓는 직사각형의 돌을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7

능(陵) 앞에 세우는 문관(文官)의 형상으로 깎아 만든 돌.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복두(幞頭)나 금관을 쓰며 손에는 홀(笏)을 든 공복(公服) 차림을 하고 있다.    우리말샘

주8

능(陵) 앞에 세우는 무관(武官) 형상으로 만든 돌. 능 앞 셋째 줄의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하나씩 세운다.    우리말샘

주9

왕릉 따위의 앞에 돌로 만들어 세워 놓은 말.    우리말샘

주10

왕릉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봉분 앞에 ‘丁’ 자 모양으로 지은 집.    우리말샘

주11

임금의 진지를 짓던 주방.    우리말샘

주12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집.    우리말샘

주13

나라의 제사를 맡아보던 관아.    우리말샘

주14

비문을 새긴 비석의 몸체.    우리말샘

주15

한자 서체의 하나. 대전(大篆)과 소전(小篆)의 두 가지가 있다.    우리말샘

주16

비석의 뒷면에 새긴 글.    우리말샘

주17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    우리말샘

주18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그것을 감독하던 임시 벼슬.    우리말샘

주19

십이지를 상징하며 각각 방향과 시간을 맡아 지키고 보호하는 열두 가지 동물의 상(像). 대개 같은 모양의 관복을 입고 머리만 동물 모양을 하고 있는데, 능이나 묘의 둘레돌에 조각되거나 관이 들어 있는 방의 내부에 벽화로 그려져 분묘를 지키는 수호신의 역할을 한다.    우리말샘

집필자
김민규(동국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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