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자정(子楨). 전주 출신. 정창록(鄭昌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홍의(鄭弘毅)이고, 아버지는 정첨(鄭瞻)이다. 김동기(金東起)·김문원(金文元)의 문인이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仁穆大妃) 유폐사건이 있자 세상을 비관하다가 인조반정 이후 29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그뒤 병자호란 때에는 동지들을 모아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뜻을 가졌는데, 국록을 먹으면서 자기와 자기 처자만 보호하는 것을 개탄하는 격문을 돌려, 적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하였다.
서인인 그는 1653년(효종 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왕실과 인척되는 부관(府官)이 횡자(橫恣)를 하고 토호들도 그에게 아첨하여 비석을 세워 칭송하므로, 그것을 미워하여 친구들과 더불어 자주(字註)로써 그 부관을 비꼬았다.
그 결과 승문원·성균관·전사시(典祀寺) 등의 한직에서만 맴돌았다. 그 뒤에 남인 허적(許積)이 물러나자, 전적·감찰·예조좌랑·병조좌랑 등의 요직과 보령·강진·순천 등의 현감, 제주판관 등을 역임하면서 이속(吏屬)들에게는 엄하게 하고 백성들에게는 사랑으로 대하였다.
연로한 뒤에는 사우(士友)들과 경사(經史)를 강론하고 의리를 강설하다가 60세에 죽었다. 높은 관직에 오르지는 못하였으나 사림적(士林的)인 도학에 바탕을 두고 백성들을 사랑하였으며, 의리를 중히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