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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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경복궁 근정전 어계 정측면
서울 경복궁 근정전 어계 정측면
건축
개념
높이의 차가 나는 두 곳을 오르내리는 데 쓰는 여러 단으로 구성된 통로.
이칭
이칭
계(階), 제(梯), 등(磴)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계단(階段)은 높이의 차가 나는 두 곳을 오르내리는 데 쓰는 여러 단으로 구성된 통로이다. 조선시대까지는 석재로 구성된 계와 목재로 구성된 제를 구별해서 불렀다. 계단에는 신분 질서와 종교적 상징이 투영되어 그 형식을 법으로 정하거나 건축적 장면으로 연출하였다. 계단 장식은 측면을 가리는 소맷돌에 집중되었다. 성문이나 누각의 실내에서 주로 발견되는 목조 계단은 경사가 가파르기 때문에 대부분 난간을 설치하였다.

목차
정의
높이의 차가 나는 두 곳을 오르내리는 데 쓰는 여러 단으로 구성된 통로.
내용

계단은 조선시대까지 계(階) 또는 제(梯)로 불렸다. 『석명(釋名)』에서 '계'를 '제'로 해석한 것처럼 두 문자는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계에는 신분 질서를 상징하는 예제적 의미가 포함되었고, 제는 보다 실용적인 맥락에서 사다리를 지칭하였다. 또한 계는 돌이나 벽돌을 잘라 만들었고, 제는 나무로 간단하게 제작되었다. 계와 제는 각각 층계(層階)와 층제(層梯)로도 사용되어 여러 단[級]으로 구성된 형태를 강조하였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域儀軌)』에서는 돌계단을 구축하는 방식에 따라 석등(石磴)과 석제(石梯)를 구별하였고, 벽돌로 쌓은 벽등(甓磴)도 묘사하였다.

계단의 규모와 장식은 건축물의 위계를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는 '읍루(挹婁) 사람들이 땅을 파고 살았는데 그 깊이가 사다리 9단[九梯]에 이르며, 깊을수록 좋게 여겼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옥사(屋舍) 조에는 신분에 따른 건축 규제에 계단이 등장한다. 삼중계를 설치하고 계석을 연마하는 것은 진골에게도 금지되었으며, 대신 이중계와 건계(巾階)가 허용되었다. 삼중계와 이중계는 계단이 나란히 여러 개 설치된 것으로, 건계는 가마가 지나가는 경사로로 해석하기도 한다. 육두품 이하가 이중계와 건계를 사용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사두품 이하에서는 산석을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산석은 산에서 채취하는 화강석(花崗石)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석재로 만든 계단은 디딤돌을 층층이 들여 쌓아 경사로를 만든다. 경사지에 건축물을 세울 때에는 여러 단의 축대를 조성하여 평지로 만든 후 건축물을 앉히게 되는데, 이때 축대의 수만큼 이를 오르기 위한 계단이 필요하다. 각 축대로 오르는 계단은 차례로 이어져서 부석사의 경우와 같이 긴 참배 동선을 이룬다. 이에 계단돌의 개수를 33, 108 등의 불교적 상징과 일치시켜 긴 계단을 오르는 수고를 경건한 수행의 과정으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개성 고려 궁성 회경전 앞 대형 계단 또한 최하단의 지대석을 제외하면 3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 너비 약 61m, 높이 7.4m에 달하는 회경전 앞 축대에는 중앙에 회경전문(會慶殿門) 폭으로 3개의 계단이, 좌우 양 끝에 회랑 폭으로 각각의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이 계단군은 창합문(閶闔門)과 회경전문 사이의 공간을 절반 가량 채우면서 고려 왕실의 권위와 위엄을 시각적으로 드러냈다.

고급 계단은 디딤돌의 측면을 다른 돌로 막아 장식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장식에 사용된 돌을 소맷돌이라 하며, 한 부재로 된 경우와 여러 부재가 결합된 경우가 있다. 여러 부재의 소맷돌은 보통 바닥을 이루는 지대석(址臺石), 삼각형의 면을 채우는 면석, 경사진 윗면을 덮는 사갑석으로 이루어진다. 지대석에는 사갑석과 면석이 밀리지 않도록 홈을 팠다. 고구려의 「요동성총성곽도(遼東城塚城郭圖)」에 이러한 형태의 소맷돌이 묘사되어 있다. 또한 발굴 조사로 확인된 백제와 신라의 사찰과 궁궐 유적에서도 동일하게 구성된 소맷돌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소맷돌은 마치 목재로 틀을 짜고 그 사이에 판재를 끼워 넣은 모습이므로 학계에서는 가구식 계단이라 부른다. 경주 불국사청운교와 백운교는 다리와 계단을 결합한 형식으로 난간을 포함해 가구식 구성 기법을 잘 표현한 사례이다. 그러나 불국사의 여러 전각에 설치된 소맷돌은 전체를 통돌로 구성한 후 조각으로 건축 부재를 표현한 것이다. 이어 영암사지 금당지 계단처럼 가릉빈가(迦陵頻伽)를 입체적으로 조각한 소맷돌이 등장하고, 통돌을 다듬어 무지개 모양의 계단을 설치하는 등 파격적인 형태의 계단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소맷돌을 하나의 부재로 사용하게 되면서 넓은 면에 금수나 화초를 조각하는 장식적 기능이 강조되었고, 경사면을 둥글게 곡선으로 처리하는 방식도 크게 유행하였다.

정교하게 장식된 석조 계단은 조선시대에도 계속 만들어졌다. 그러나 억불정책으로 인해 사찰을 건축하는 일 자체가 줄어들면서 계단을 만드는 일 역시 많이 줄어들었다. 또한 석조 장식도 유교적인 것으로 변화하였다. 특히 계단의 소맷돌에는 태극 무늬 조각을 새기는 것이 유행하였는데, 궁궐의 건축물뿐 아니라 왕실의 후원으로 지어진 회암사지 보광전지 등에서도 태극 무늬 조각이 발견된다. 『화성성역의궤』에서는 구름 무늬를 조각한 소맷돌을 운각대우석(雲刻大隅石)으로 표기하고 있다. 임금이 이용하는 계단은 더욱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예를 들어, 경복궁 근정전의 이중 월대의 정면에는 세 부분으로 구획된 넓은 계단이 자리잡고 있다. 이 중 가운데가 왕이 지나가는 어도로, 길게 누운 해치 조각이 좌우의 영역을 구분하며, 디딤돌의 앞면을 화려하게 조각하였다. 또한 계단의 가운데에 구름과 봉황을 조각한 큰 판석을 두어 가마가 지나가는 자리를 표시하였는데 이를 답도(踏道)라고 한다. 민간에서도 계단은 필수적인 건축 요소였지만 잘 다듬은 돌[熟石]을 이용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한편, 뒷뜰의 비탈면을 따라 단을 만들고 단마다 화초를 심은 시설을 화계(花階)라고 하여 이를 계단의 범주로 인식하였다.

목조 계단은 일반적으로 건축물 내부에서 사용되며, 대부분의 성문 건축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서울의 숭례문, 평양 보통문, 창덕궁 돈화문, 창경궁 홍화문, 화성 팔달문 등 대부분의 성문에는 내부에 목조 계단을 두고 상층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창덕궁 주합루, 경복궁 경회루 등 중층 누각 건축에도 목조 계단이 설치되었다. 목조 계단은 좌우에 경사진 틀을 설치하고 그 사이에 디딤판을 차례로 짜 넣어 완성하였으며, 석조 계단에 비해 경사가 가파르기 때문에 대부분 난간이 설치되었다. 계단의 난간은 상층 마루의 난간과 양식을 통일하는 것이 보통이다. 한편 다락이나 헛간에 오르내리는 간단한 계단의 경우에는 통나무에 발을 딛을 수 있는 홈을 파내어 한 번에 걸쳐 놓는 방식이 자주 사용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화성성역의궤(華城城域儀軌)』
『삼국사기(三國史記)』
『석명(釋名)』
『삼국지(三國志)』

논문

남창근·김태영, 「백제계 및 신라계 가구식 기단과 계단의 시기별 변화특성」(『건축역사연구』 80, 한국건축역사학회, 2012)
이상해, 「삼국사기 옥사 조의 재고찰」(『건축역사연구』 8, 한국건축역사학회,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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