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압력이 가중되는 가운데 만주 일대에 집결한 독립군이 대한독립군단으로 편성되어 노령(露領)으로 진입하였다. 대한독립군단 여단장 지청천부대는 1921년 1월 초 호림선(虎林線) 종점인 호림역에서부터 5리 되는 이만시(Iman市)로 들어갔다. 여기서 일본수비대와 2시간 여에 걸친 전투를 전개, 점령했는데 이를 영안사건(寧安事件)이라 한다.
이만시는 산업이 발달해 전략적으로 독립군양성에 적당한 지역이었다. 이만시에 도착한 대한독립군단은 전원이 동상으로 고생하면서도 무기 구입에 전력해 체코슬로바키아의 장총을 1정에 10원 내지 20원에 구입하였다. 홍범도부대도 노령에 들어와 근거지 자유시(自由市)에서 소련군과 공동작전을 계획 중에 있었다.
독립군의 근거지는 연해주 고르찌게에 있었으며, 총사령 김규식이 이곳에서 각처에 분산해 있는 독립군부대와 연결하고 있었다. 이만에 있던 지청천부대도 홍범도의 소개로 소련 적계군(赤系軍)의 박일리아 연대장과 한인으로 된 군대를 알게 되었다. 박일리아 연대장은 소련 교관을 독립군부대에 배치하고 전술법을 교육시켰다.
그 해 2월 오하묵의 공으로 치타에 있던 완충정부(緩衝政府) 수석 카라한과 독립군과의 공동작전 및 협조에 관한 협정이 성립되었다. 이 군사협정에서 독립군은 적계군을 도와 각지에서 활약하고 있는 백계군(白系軍)을 격멸할 것을 전제로 다섯 가지 협정을 조인하였다.
그 중 독립군 양성을 위해 고려무관(군관)학교를 건축해 준다는 협약에 따라 소련의 협조로 독립군은 군관학교 설립차 바이칼호(湖)를 넘어 한국동포가 살고 있는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였다. 독립군은 여기서 고려혁명군을 재편하고 오하묵을 단장으로 추대하였다.
고려혁명군관학교의 4층 건물 2동을 세워 초대 교장에 유동열이 취임하였다. 유동열이 사임한 뒤 지청천을 교장으로 선임하고 사관을 양성하는 한편, 적계군과 함께 백계군토벌전에 종군하였다. 이 혁명군관학교에는 지청천 외에 이계(李繼) · 채영(蔡英) · 최진동 · 조욱(曺昱, 조성환(曺成煥)) · 강국모(姜國模) · 홍범도 · 안무(安武) · 김규식 · 김경천(金慶天) 등이 지도자로 활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