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 배향하고 지방의 유학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서 설립되었던 바로서 최초의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537년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장지가 현재의 원당동 서삼릉 구역으로 정해지자, 본디부터 그 자리에 있던 향교를 대자동의 고읍마을로 이전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에 소실되어 1595년에 다시 지었고, 1689년 왕명에 의해 고양동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이후 한국 전쟁 때 불타버린 명륜당, 전사청, 외삼문은 1984년에 새로 만들었고, 그 외 건물들은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 담장은 1970년에 보수되었고, 명륜당은 1975년에 다시 건립되었다. 1983년에는 외삼문과 향교 정면의 홍살문이 새로 세워졌고, 1988년에도 대대적으로 보수작업을 해서 현재의 모습이 갖추어졌다.
현존하는 건물은 대성전(大成殿)을 중심으로 동재(東齋) · 서재(西齋) · 내삼문(內三門) 등이 있으며, 대성전 안에는 5성(五聖)의 위패가, 동무 · 서무에는 송조2현(宋朝二賢) 및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서무의 뒤쪽으로 전사청이 비스듬하게 위치하고 있는데 이 건물은 제례 때 전사관이 집무하면서 제사 준비에 소홀함이 없도록 점검하는 곳으로서 현재 이 곳 향교에 남아 있는 건물로는 가장 오랜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 배치는 교육 공간을 앞쪽에, 제사 공간을 뒤쪽에 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를 따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전답과 노비 · 전적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조선 후기 이래 향교는 교육 기능이 쇠퇴하고 대신 선현에 대한 제향을 통한 교화 기능을 주로 담당하였다. 봄 · 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고 초하루 · 보름에 분향을 올리고 있으며,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이 향교는 1985년 경기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