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문 ()

정치
인물
제6·7·8·9·10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정치인.
이칭
인지(仁之)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21년
사망 연도
1998년
출생지
서울
정의
제6·7·8·9·10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정치인.
개설

서울 출생. 호는 인지(仁之). 이름 흥문과 아호 인지는 동대문 태몽을 꾼 후 조부가 동대문의 본 이름인 흥인지문(興仁之門)에서 따서 지은 것이라 한다. 정계에 입문한 뒤 한 번도 정통야당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1950년대부터 1980년까지의 ‘한국야당사의 증인’으로 불리던 인물이다.

활동사항

1941년경기상고를 졸업(1970년고려대 경영대학원 수료)하고, 1942년부터 도매상인 협신상사의 지배인, 1947년흥한무역(興韓貿易) 사장을 맡아 일찍부터 사업에 나섰다. 사업가로서의 자질을 인정받고 있던 그가 정계에 관심을 보인 것은 광복 직후 조만식(曺晩植)의 조선민주당에 참여하여 황해도당 재정부장을 지내면서 부터이나, 정계입문은 29세 되던 해인 1950년 5월 제2대 민의원선거를 앞두고 조병옥(趙炳玉)과 선거참모로 인연을 맺으면서부터였다.

이후 한편으로는 1957년동아연탄 부사장을 역임하는 등 사업가로서 활동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승만정권의 갖은 야당탄압에도 불구하고 성실한 참모이자 재정후원자로서 조병옥의 정치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러나 야당의 집권을 통한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그의 꿈은 1960년 대통령선거에 나선 조병옥의 급서로 좌절되고 말았다.

1960년4·19혁명 직후 유진산(柳珍山)과 함께 민주당 구파로 활동했고, 이후 1963년 제6대 국회의원(전국구 민정당), 1967년 제7대 국회의원(전국구 신민당) 및 신민당 사무총장, 1971년 제8대 국회의원(서울 성북병구, 신민당), 1973년 제9대 국회의원(서울 성북구, 신민당) 및 신민당 부총재, 1976년신민당 최고위원, 1979년 제10대 국회의원(서울 도봉구, 신민당) 및 국회부의장 등을 지냈다.

투쟁보다는 대화와 타협을 강조하는 야당 중진의원으로서 유진산 계보로 분류되었으나, 원만한 성품과 합리적인 조정능력, ‘보증수표’라고 불릴 정도의 철저한 약속이행 등으로 주류와 비주류 모두로부터 신뢰할 수 있는 조정자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1980년전두환(全斗煥)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의 강제적인 정치활동규제로 정치활동을 마감했다. 1984년 정치활동규제에서 해금되었으나, 통합야당이 아니면 정치를 재개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원칙을 고수하여 정계에 나아가지 않았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통일민주당의 김영삼(金泳三), 평화민주당의 김대중(金大中) 두 총재로부터 각기 정치복귀의 제의를 받았으나 이 역시 거절하였고,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의 국무총리직 제의도 거절하였다. 1980년 정치활동규제 이후청주방직 상임고문으로 소일하면서 저술과 신문기도 등의 활동에 전념하였다.

저서

저서로는 자서전인 『정치현장 40년, 못다 이룬 민주의 꿈』, 정치평론집인 『대화의 정치, 화합의 정치』 가 있다.

상훈

1998년 사후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화의 정치 화합의 정치』(고흥문, 1997)
『정치현장 40년 못다 이룬 민주의 꿈』(고흥문, 도서출판 무애, 1990)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현대인물자료(http://www.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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