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전(箕田)이라고도 한다. 정전이라고는 하지만, 주나라의 정전법(井田法)과는 달리 전(田)자 모양의 할지법(割地法)에 의해 구획된 토지이다. 평양 외성(外城)의 남쪽에서 대동강변에 이르는 지역(지금의 평양역 부근)에 설치되었는데, 고려·조선시대를 거쳐 광복 전까지 잔형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기자정전의 존재는 『고려사』 지리지에서 최초로 확인되고 왕기(王圻)의 『삼재도회(三才圖會)』와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도 언급되어 있으며, 한백겸(韓百謙)에 의해 구체적인 조사와 연구가 진행되었다.
기자정전의 잔형 중에서 가장 정제된 형태를 갖춘 구역은 평양 외성의 함구문(含毬門)과 정양문(正陽門) 사이에 있던 64구(區)이다. 이 기자정전의 기본 구조는 64무(畝)의 면적인 4개의 ‘구’와 십(十)자 모양의 일묘로(一畝路)로 구성된 ‘전(田)’이 가로·세로 각 4열씩 모두 16개가 배치되고, 각 ‘전’ 사이에 3묘 넓이의 삼묘로(三畝路)가 갖추어진 형태였다.
64구의 기본 구조를 이루는 하나의 ‘구’는 고구려척(高句麗尺)을 기준으로 가로·세로 각 512척인 정사각형을 이루며, 64구의 기본 구조 또한 정사각형이다. 기본 구조의 외곽 삼면에는 통행을 주 목적으로 한 9묘 넓이의 큰 길이 형성되어 있으나, 이는 기본 구조의 구성 요건은 아니었던 듯하다.
한편 강에 잇닿아 있는 지역에는 하나의 ‘전’을 이루지 못하고 2∼3개의 ‘구’만을 갖춘 여전(餘田)이 있었는데, 이 여전의 각 ‘구’도 64무의 면적인 정사각형이었다. 이러한 평양의 기자정전 구획에는 중국 하(夏)·은(殷)시대의 양전법(量田法)이 사용되었다고 보이는데, 길이 조금 넓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그리고 이 기자정전의 할지법은 후일 ‘사마정전법(司馬井田法)’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기자정전은 고구려의 평양 천도를 전후한 시기에 이루어진 도성의 도시 계획에 따른 것이라는 설명도 있으며, 고구려 멸망 후평양에 주둔했던 당나라 군사가 설치한 둔전(屯田)에서 전해 온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또 그 설치 지역이 평양외성의 안쪽이었다는 기록도 있으며, 잔형이 외성 밖뿐만 아니라 중성(中城)의 내천(內川) 지역에도 있었다는 의견도 있다.
뿐만 아니라 기자정전의 구조도 전자 형의 ‘전’ 16개를 단위로 한 형태가 아니라 주나라의 정전과 같은 정(井)자 모양이었다는 견해도 있고, 각 ‘구’의 형태가 정사각형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이설도 있다. 기자정전에 대해 고려 때까지는 세(稅)를 거두지 않았으나, 조선 태조 때 이르러 십일세(什一稅)을 거두고 공상(供上 : 토산물을 상급 관청이나 고관에 바치는 것)에 충당하도록 했는데, 그 세를 마채(麻菜)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