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강동면 괘방산(掛榜山)에 있는 사찰.
건립경위와 변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강릉부 동쪽 30리에 이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등명사라 한 것은 풍수지리에 입각하여 볼 때 이 절이 강릉도호부 내에서는 암실(暗室)의 등화(燈火)와 같은 위치에 있고, 이곳에서 공부하는 수학도(修學徒)가 3경(三更)에 등산하여 불을 밝히고 기도하면 급제가 빠르다고 한 데서 연유한다는 전설이 전한다.
현재 절 근처에는 고려성지(高麗城址)가 있다. 이 성은 고려시대에 등명사의 중요한 물품들을 보관하기 위해서 창고를 짓고 성을 쌓았다는 사방 1㎞의 석성이다. 이로 보아 당시의 사찰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 중기에 등명사는 폐허가 되었다.
당시의 왕이 안질(眼疾)이 심해서 점술가에게 물어보니 동해 정동(正東) 큰 절에서 씻은 쌀물이 동해로 흘러 들어가서 용왕이 노했기 때문이라 하였다. 왕의 특사가 원산(元山)을 거쳐 배편으로 동해 정동에 와서 보니 점술가의 말이 맞아 등명사를 폐사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 뒤 1956년 경덕(景德)이 옛터에 절을 중창하고 낙가사라 하면서 이전의 이름인 등명을 붙여 등명낙가사라고 개칭하였다. 1982년에는 청우(淸宇)가 극락전 · 약사전 · 삼성각 · 범종각 · 요사 등을 건립하여 오늘에 이른다. 1997년 영산전을 지었다.
형태와 특징
또한, 이 절에는 1971년 강원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등명사지 오층석탑이 있다. 선덕여왕 때 세워진 것으로 전해지지만 탑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이다. 이 탑은 은은한 무늬로 조각된 지대석 위에 축조되었는데, 옥개석의 귀퉁이가 조금씩 파손되었고 기단석은 연꽃 무늬로 수놓여 있다. 특히 2층 기단부에는 돌 자물쇠를 채워 놓았던 관계로 탑 안의 보물이 도굴되지 않은 채 보존되어 왔다.
원래는 이와 같은 탑이 3개였는데, 하나는 함포 사격으로 파괴되어 그 잔해만이 바닷가에 남아 있고, 또 하나는 수중탑(水中塔)이었으나 언제부터인지 행방이 묘연하다고 한다.
의의 및 평가
참고문헌
원전
- 『삼국유사』
- 『신증동국여지승람』
논문
- 신종원, 「水多寺址 出土 靑銅飯子 및 靑銅燭臺」(『강원사학』 4, 강원사학회, 1988)
- 정병삼, 「기록과 유물로 본 정암사의 창건과 전승」(『사학연구』 118, 한국사학회, 2015)
- 홍성익, 「洛伽寺에 所在한 考古資料의 종합적 검토」(『인문과학연구』 46,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5)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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