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일명 ‘등명낙가사’라고도 한다.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慈藏)이 창건하여 수다사(水多寺)라 하였다.
자장이 이 절에 머무를 때, 꿈속에서 중국 오대산의 북대(北臺)에서 보았던 스님이 나타나 말하기를 “내일 저 큰 소나무 밑에서 꼭 만나자.”고 하여 이튿날 그 자리에 갔더니 그곳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신라 말기의 병화(兵火)로 소실된 뒤 고려 초기에 중창하여 등명사(燈明寺)라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강릉부 동쪽 30리에 이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등명사라 한 것은 풍수지리에 입각하여 볼 때 이 절이 강릉도호부 내에서는 암실(暗室)의 등화(燈火)와 같은 위치에 있고, 이곳에서 공부하는 수학도(修學徒)가 3경(三更)에 등산하여 불을 밝히고 기도하면 급제가 빠르다고 한 데서 연유한다는 전설이 전한다.
현재 절 근처에는 고려성지(高麗城址)가 있다. 이 성은 고려시대에 등명사의 중요한 물품들을 보관하기 위해서 창고를 짓고 성을 쌓았다는 사방 1㎞의 석성이다. 이로 보아 당시의 사찰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 중기에 등명사는 폐허가 되었다.
당시의 왕이 안질(眼疾)이 심해서 점술가에게 물어보니 동해 정동(正東) 큰 절에서 씻은 쌀물이 동해로 흘러 들어가서 용왕이 노했기 때문이라 하였다. 왕의 특사가 원산(元山)을 거쳐 배편으로 동해 정동에 와서 보니 점술가의 말이 맞아 등명사를 폐사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 뒤 1956년 경덕(景德)이 옛터에 절을 중창하고 낙가사라 개칭하였으며, 1997년 영산전을 지었다. 1982년에는 청우(淸宇)가 극락전 · 약사전 · 삼성각 · 범종각 · 요사를 건립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 · 극락전 ·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 일명 大靈山殿) · 요사채 등이 있다. 오백나한전 안에 안치된 오백나한상은 인간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 보유자) 유근형(柳根瀅)이 5년에 걸쳐 만들어서 1977년 10월에 모신 것이다. 500구가 각기 다른 모습을 취하고 있는 이 나한상은 다른 곳에서는 예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청자불상이다.
또한, 이 절에는 1971년 강원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등명사지오층석탑이 있다. 창건과 함께 선덕여왕 때 세워진 것으로 전해지는 이 탑은 은은한 무늬로 조각된 지대석 위에 축조되었는데, 옥개석의 귀퉁이가 조금씩 파손되었고 기단석은 연꽃무늬로 수놓여 있다. 특히 2층 기단부에는 돌자물쇠를 채워 놓았던 관계로 탑 안의 보물이 도굴되지 않은 채 보존되어 왔다.
원래는 이와 같은 탑이 3개였는데, 하나는 함포사격으로 파괴되어 그 잔해만이 바닷가에 남아 있고, 또 하나는 수중탑(水中塔)이었으나 언제부터인지 행방이 묘연하다고 한다.
현재 이 절에서는 매년 음력 10월 15일부터 백일축수도량을 개설하고 있으며, 오백나한전 밑에는 등명약수(燈明藥水)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