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 남도진성 ( )

건축
유적
국가유산
조선시대,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 일원에 위치한 수군진성.
유적
건립 시기
조선 전기
관련 국가
조선
둘레
564m
면적
41,367㎡
소재지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진도 남도진성(珍島 南桃鎭城)
분류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곽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사적(1964년 06월 10일 지정)
소재지
전남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 149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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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진도 남도진성은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 일원에 위치한 조선시대 수군진성이다. 1500~1501년경에 축성되어 전라우수영 임치진관 혹은 가리포진관에 소속되어 진도 남해안의 일부 권역과 서쪽 해안 등을 관할하였다. 2022년까지 7차례에 걸쳐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 축성법, 문지, 내부 시설, 선소 등이 확인되었고, 15세기~19세기의 고고 자료들이 확인되어 성곽의 축조 시기와 폐성 시기를 알려 준다.

정의
조선시대,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 일원에 위치한 수군진성.
연혁

왜구를 방어할 목적으로 설진된 남도포진(南桃浦鎭)은 1438년(세종 20) 정월에 설치되어 전라 수영에 속하였다가, 1479년(성종 10) 정월에 전라수영이 좌‧우수영으로 분리 개편된 후에 전라우수영 임치진관(臨淄鎭管)에 속하였다. 그 후 1522년(중종 17)에 전라우수영 가리포진관(오늘날 완도)으로 옮겨 속하게 되었고 1895년 갑오개혁 때 폐진되었다.

남도포진은 상대적으로 허술한 진도군의 서쪽 해안과 그 주변의 섬뿐만 아니라 오늘날 신안군 남부의 정산, 신의, 하의도와 그에 딸린 섬들까지를 방어 구역으로 삼았다.

남도포진에 축성된 남도진성의 축조 시기에 대한 관련 기록은 『남도포진지』가 불에 타 버려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남도진성의 규모(1,233척)와 시설(우물 1, 샘 1)이 기록되어 있다. 전라도 수군진의 2차 축성 작업은 마도포진, 달량포진, 어란진, 금갑도진, 남도포진, 목포진 순으로 이루어졌다. 마도포진은 1499년 진성 축조 논의가 이루어진 후 1500년 마도왜변 때 이미 완성되어 있었고, 목포진성은 1501년(연산군 7)에 축성된 것으로 보아 남도진성은 1500∼1501년경에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1555년(명종 10) 5월 을묘왜변(乙卯倭變) 때 서해안으로 북상하던 왜구들에게 남도포진이 함락되어 불바다가 되기도 하였다.

1872년의 『남도진여지도(南桃鎭輿地圖)』(圭10452)에 객사, 동헌, 내아, 사령청, 진무청, 서고와 동고, 군기고 등이 그려져 있어 진성 내의 건물들을 알 수 있다. 남문 밖에 세운천을 건너는 단운교와 쌍운교(길이 550cm, 너비 250cm, 높이 250cm) 2개의 무지개다리가 단아한 멋을 풍기며 잘 남아 있다.

남도진성은 남벽을 제외한 성벽이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남벽을 비롯해 훼손된 부분은 모두 복원되었다. 동ㆍ서ㆍ남문의 3개 문과 옹성도 복원되고, 성 안에 있었던 남동마을은 모두 옮겨 갔으며 현재 동헌과 내아, 객사 등이 복원되어 옛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발굴 경위 및 결과

남도진성은 현재까지 총 7차례에 걸쳐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 진성의 축성법, 문지, 내부 시설, 선소 등이 확인되었다. 남도진성의 성벽은 바깥쪽은 돌로 쌓고, 안쪽은 흙과 잡석으로 다짐하는 편축식으로 축조하였다. 먼저 생토층 위에 흙과 잡석을 평탄하게 깔아 정치층을 마련한 후 1매의 판석재를 지대석으로 놓아 기저부를 조성하였다. 그런 후에 지대석에서 10cm 정도 안쪽으로 물려 1m 내외의 대형 석재를 면석으로 사용하였으며, 점차 위로 올라갈수록 작은 석재를 사용하여 거의 수직에 가깝게 축성하였다. 방형 및 장방형의 성돌은 대부분 눕혀 쌓았고, 큰 성돌 사이에 작은 쐐기돌을 끼워 수평을 잡았다.

성문은 동ㆍ서ㆍ남문이 있고, 약 310~370cm의 너비를 가진 개거식(開渠式)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편문식(片門式) 반월 모양의 옹성이 함께 배치되어 있다. 이 가운데 동문지는 통로부에 박석을 부설하여 문루의 하중을 효과적으로 분산시키고자 하였다. 동문지의 옹성은 기반층을 굴착하고 퇴박석을 1단 배치한 다음 회갈색 사질 점토를 깔아 단단하게 다져 수평층을 마련한 후 지대석을 배치하였다.

치(雉)는 네 모서리에 각각 1개씩 모두 4개소가 설치되어 있으며, 해자는 작은 시냇물을 이용하여 자연 해자의 역할을 하게 하였다. 이 시냇물을 건너기 위한 홍교인 단운교(單雲橋)와 쌍운교(雙運橋)가 남문 앞쪽에 위치해 있다.

남문지에서 서남쪽으로 약 400m 떨어진 곳에서 선소가 확인되었다. 이곳은 바다에서 바라보았을 때 전혀 보이지 않아 병선을 감추기에 용이한 점을 가지고 있다. 선소의 평면 형태는 직사각형이고, 길이 33.3m, 너비 8m, 현재 높이 630cm로 지형이 높은 육지 쪽은 낮게, 지형이 낮은 바다 쪽은 높게 축조함으로서 지형의 경사도에 맞추어 축조하였다. 기저부는 전체적으로 잔자갈을 깔아 조류의 흐름에도 영향이 없도록 처리하는 한편, 바닷물의 영향을 크게 받는 부분은 판목과 이를 고정한 나무 기둥, 그리고 깬돌을 깔아 보강하였다. 배를 정박하기 위한 석축 시설은 상단과 하단의 2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축조 기법은 남도진성의 축성법과 동일하다.

의의

남도진성은 조선시대 진도와 서남해안 지역을 보호하기 위한 지리적 요충지에 있는 유적으로 전라우수영 관할 수군진 유적 가운데 유일하게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조사 결과 옹성부와 체성부에서 박석, 지대석, 적석 시설 등이 확인되어 조선 전기 진성의 기저부 축조 기법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참고문헌

원전

『세종실록』
『명종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지』
『여지도서』
『대동지지』
『남도진여지도(南桃鎭輿地圖)』
『남도포진지』

단행본

『진도 남도석성』(명지대학교 부설 한국건축문화연구소, 1999)
『진도 남도석성 선소유적』(전남문화재연구원, 2006)
『조선시대 수군진조사Ⅰ, 전라우수영편』(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2011)
『진도 남도석성』(목포대학교박물관, 2011)
『진도 남도진성』(동신대학교 문화박물관, 2014)
『진도 남도진성 동문지 발굴조사』(고대문화재연구원, 2018)
『진도 남도진성 동문지 주변 체성부』(영해문화유산연구원, 2021)
『진도 남도진성 동문지』(고대문화재연구원, 2022)

논문

고용규, 「진도 남도포진(성)의 역사와 공간구조」(『진도 남도석성』, 목포대박물관, 2011)
관련 미디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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