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그릇을 만드는 차진 흙에 물을 섞어 잘 찧어 네모꼴로 만들고 그 위에 글자를 새겨 두껍게 백랍(白蠟)을 칠한 다음 구워서 만든 활자이다. 흙을 재료로 하여 활자를 만든 것은 북송 때 심괄(沈括)이 엮은 『몽계필담(夢溪筆談)』에 나타나 있다.
그 기록에 따르면, 1041∼1048년간에 송나라의 필승(畢昇)이 차진 흙을 빚어 돈닢모양으로 얇게 만들어 그 위에 글자를 새긴 다음, 그 하나하나를 불에 구워 활자를 만들어냈는데, 이를 ‘교니활자(膠泥活字)’라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언제 처음으로 도활자를 만들어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동국후생신록(東國厚生新錄)』에 비로소 도활자에 관한 기록이 나타난다.
그 기록에 의하면, 영조 초기 이재항(李載恒)이 황해병사(黃海兵使)로 있을 때 도자기 만드는 흙을 사용하여 직접 자본(字本)을 써서 만들어냈는데, 그 제조방법은 다음과 같다.
질그릇 만드는 찰흙을 곱게 빻아 느릅나무 즙액과 같은 물을 잘 섞어 고루 찧어 빚는다. 한편 이에 앞서 나무판을 사용하여 둥근 주판알 같은 구멍을 줄줄이 뚫고 그 뒷등의 흙이 나오는 곳을 쌍륙의 주사위와 같이 하여 네모꼴로 활자를 만들어냈다.
이것을 햇볕에 벌려 놓고 말린 다음, 『홍무정운』의 글자체로 자본을 당지(唐紙)에 써서 그 위에 뒤집어 붙이고 걸러서 새겨 백랍을 두텁게 칠한 뒤 불에 구워 활자 하나하나를 정교하게 만들어냈다. 이를 토주자(土鑄字)라 하였다.
도활자의 인본으로는 아유가이(鮎具房之進)가 처음으로 『삼략직해(三略直解)』와 『경사집설(經史集說)』을 들었고, 이어 마에마(前間恭作)는 『옥찬(玉纂)』을 들었다.
그 근거는 『삼략직해』의 권말에 적혀 있는 “상지2년(경종 2, 1722) 임인 삼월 청해 문회헌 도자계간(上之二年壬寅三月靑海文會軒陶字契刊)”의 간행기록에 의한 것이다.
그 발표 이후 이를 시인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전적으로 부인하며 목활자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런가 하면 긍정도 부인도 하지 않고 중용적 입장에서 이를 ‘전도활자(傳陶活字)’로 일컫는 이도 있어 정론이 없었다. 그러던 중 미국 컬럼비아대학 동아도서관의 화산문고(華山文庫)에서 김세렴(金世濂, 1593∼1646)의 『동명선생집(東溟先生集)』 도활자본 완질이 발견되었다.
그 책의 발문에 “정사(영조 21, 1737) 5월 초하루에 흙활자로 인쇄하기 시작하여 그 해 7월 그믐에 마치었다(丁巳五月初吉以土字開印同七月晦日畢役).”는 기록이 있어 알게 된 것이다.
그 인본을 두루 실사해 볼 때, 어느 글자를 막론하고 글자획에 나뭇결이 보이지 않고, 먹색이 순연하며, 각자(刻字)할 때 반쯤 말린 다음 한 번에 칼질하여 새기기 때문에 나무활자의 경우와 달리 글자획의 끝이 뾰족하거나 예리하지 않고 뭉특하거나 둔탁한 편이다.
특히 파임획에서 그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또한 글자 모양과 획의 굵기에서도 균정도와 새김의 기법 등이 나무활자의 경우와는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위에서 든 『삼략직해』에서도 새김의 특징이 같게 나타난다. 도활자계(陶活字契)에서 새겨 찍은 도활자본임이 확실하다.
이 도활자의 실물은 1911년 6월 1일 조선총독부 취조국이 궁내부(宮內府) 소유의 규장각도서와 함께 활자를 인수한 인계서에 도활자 큰 자 96개, 작은 자 129개, 도합 225개가 적혀 있는데, 국립중앙박물관이 일제로부터 인수한 것은 200여 자인 것으로 발표되었다. 그 중에서 고 김두종(金斗鍾) 박사가 입수하여 소개한 두 개의 도활자를 보면 글자체가 방홍무정운자체(傍洪武正韻字體)이다.
몇 해 전 경상도 상주지방에서 나왔다는 도활자가 있는데, 이것은 『삼운성휘(三韻聲彙)』 인본의 글자체를 방불케 하는 큰자 활자이며 몸통의 중앙에 세로로 구멍이 뚫려 있다.
판을 짤 때 끈으로 꿰어 배자(글씨를 벌여 놓음)할 수 있도록 고안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이규경(李圭景)이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언급하였듯이 청나라 무영전의 취진판에서 영향을 받은 뒤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