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상일록(東槎上日錄)』은 오윤겸(吳允謙, 1559~1636)이 1617년(광해군 9) 7월부터 11월까지 5개월간의 기록이다. 사행의 목적은 임진왜란 때의 피로인 쇄환이 주요 내용이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오사카 평정 및 일본 통일의 축하를 겸한 사행이었다. 일본 기행 기록을 집대성한 『해행총재(海行摠載)』의 제9책에 수록되었다.
이 사행은 임진왜란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오사카[大阪] 평정을 축하하기 위한 회답사행이었으나, 임진왜란 때의 피로인(被虜人) 쇄환에 더 큰 목적이 있었다. 당시 사행에는 부사(副使)인 박재(朴梓)와 종사관인 이경직(李景稷)이 참여하였고, 그들은 각각 『동사일록(東槎日錄)』과 『부상록(扶桑錄)』을 남겼다.
이 책은 일기와 시로 구성되었다. 일기는 빠진 날이 없이 기록되었으나 정사로서 중요시되는 문제, 즉 양국 사이의 예의, 피로인(被虜人) 쇄환 등을 위주로 기록하였다. 예의 문제는 일본국서의 어휘와 일본 관백(關白)이 사행에게 준 은화가 문제되어 결국 국서는 고치고 은화를 반환하였다. 피로인 쇄환에 대마도주(對馬島主)는 비협조적이었는데, 그것은 쇄환을 핑계로 경제적 이득을 얻기 위한 간계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사행이 직접 명단을 들고 나서 찾기도 하고, 못 보내겠다는 주인과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쇄환인은 230여명이었는데, 1607년(선조 40) 제1차 때 쇄환한 숫자가 1,418명이었음에 비하여 결코 적은 숫자는 아니다.
조선사행이 관백과 문답한 내용 중 전일의 잘못을 뉘우치고 앞으로는 신의를 지키겠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당시 막부(幕府)는 조선에 대하여 퍽 우호적인 태도였음을 엿볼 수 있다.
시는 모두 23수인데, 사행 간에 문답한 시, 지나는 도중에 지은 영물시(詠物詩), 대마도의 학자들과 화답하였거나 내려준 시가 수록되었다.
이 책은 『동사일록』과 『부상록』과 함께 17세기 초반 포로 쇄환 등 조선과 일본의 외교 현안을 이해하는데 기본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