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용기 ()

근대사
인물
1919년 4월 4일에 일어난 이리 장터 만세 시위를 이끈 독립운동가.
이칭
관제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78년
사망 연도
1919년
출생지
전라북도 익산군(지금의 익산시)
주요 경력
도남학교 교사
대표 상훈
건국포장(1977)|건국훈장 애국장(1990)
관련 사건
이리 장터 만세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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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문용기는 1919년 4월 4일에 일어난 이리 장터 만세 시위를 이끈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 · 1운동이 발발하자 익산의 남전교회 교인과 도남학교 교사, 학생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4월 4일 이리 장터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할 때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에 앞장서다가 일본 헌병의 칼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정의
1919년 4월 4일에 일어난 이리 장터 만세 시위를 이끈 독립운동가.
인적사항

문용기(文鏞祺, 1878~1919)는 전라북도 익산군(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출신으로, 호는 관제이다.

주요 활동

한학을 공부해 서당 훈장을 하던 중 24세에 군산 영명학교에서 한문 교사 겸 학생으로 입학해 보통과 과정을 이수하였다. 30세가 되던 1909년에는 목포 영명학교(왓킨스학교)에 다시 들어가 한문 교사를 겸하여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함경도 갑산에서 금광을 경영하는 미국인의 통역사로 8년을 근무하였다.

1919년 3 · 1운동 발발 직후 고향으로 돌아와 남전교회가 설립한 도남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남전교회 교인 및 도남학교 교사, 학생들과 함께 4월 4일 이리 장날에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1919년 4월 4일 이리 장터에는 기독교인과 학생 등 3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이 자리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시위대를 이끌고 시가행진을 전개하였다. 시위대가 1,000여 명을 넘어서자 일본 헌병대는 물론 소방대와 일본인 농장의 노동자들까지 동원되어 진압에 나섰다. 만세 시위에 앞장서다 일본 헌병이 휘두른 칼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追敍)되었다. 1948년 3월 1일 익산 지역 유지들이 순국현장인 이리 구시장에 순국열사 문용기 3 · 1운동 기념비를 세웠다.

참고문헌

논문

김은수, 「익산 4.4만세운동의 특징과 선교적 의미」(『선교신학』 47, 한국기독교학회 선교신학회,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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