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등척기」는 『조선일보』 부사장이자 주필인 안재홍이 1930년 7월 23일 밤 경성역을 출발해서 백두산을 등반하고 8월 7일 북청역을 떠날 때까지의 기록을 담은 기행문이다. 이 시기는 일제의 만주 침략이 노골화되는 한편 신간회 해체로 민족 운동은 위축되어 가던 전환기였다. 안재홍 역시 1927~1929년 사이 『조선일보』 필화(筆禍) 사건으로 세 차례 연달아 옥고를 치뤘다. 이런 시기에 이뤄진 백두산 주1 기사는 조선 민족 정신의 회복을 위한 기획이었다. 이 기획에는 안재홍 외에도 변영로, 김찬영, 성순영, 김상용, 황오 및 기타 동식물학자들이 동반했고, 백두산이 국경 지대였기에 일본 주둔군 수백 명도 함께 이동했다.
「백두산등척기」는 여행이 끝난 직후인 1930년 8월 11일부터 9월 15일까지 『조선일보』에 34회에 걸쳐 연재되었고, 1931년 6월 유성사(流星社)에서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백두산등척기」는 단행본으로 출간할 때 34회의 연재분을 23장으로 구성하고, 각 장에 제목을 새로 붙였다. 대략의 여정은 다음과 같다. 경성→ 주을온천→ 차유령을 넘어 무산→두만강 기슭 농사동→천평→신무치→무두봉→ 백두산정계비→ 천지→ 허항령→포태리→압록강 상류 가림리→혜산진→풍산→북청.
「백두산등척기」에서는 백두산의 자연에 대한 꼼꼼하고도 간결한 묘사, 변경민의 척박한 삶을 향한 애정 어린 시선, 백두산 곳곳에 얽힌 조선 상고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엿보인다. 안재홍은 기차를 타고 북으로 향하면서 조선 질소 주2 공장이나 단천 사건 같은 시국 문제를 떠올리고, 백두산정계비 곁에서 북간도와 조선조 500년의 역사를 회고한다. 천지에서는 모계 사회인 성모 시대부터 부계인 단군 시대로 넘어오는 고대사를 길게 기술하고, 백두산 하산 후에도 포태리, 가림리, 풍산, 북청 등에서 주3 동포의 생활상을 세세하게 관찰한다.
안재홍은 3·1운동부터 일제 말 조선어학회 사건까지 민족 운동에 관여하여 무려 9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룬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다. 일제시기 신간회 결성을 주도하고 해방 후에도 초계급적 통합 민족 국가 수립을 위해 노력하다가 납북되었다. 이러한 실천적 민족주의자로서의 면모는 「백두산등척기」에도 잘 드러난다.
「백두산등척기」는 1920년대 국토 순례 기행문의 연장선에 있지만, 최남선이나 이광수의 글들과 결이 다르다. 이광수의 문학적이고 화려한 수사보다는 단정하지만 무미건조하지 않은 문체로 핵심을 기술하고, 최남선처럼 천지에서 조선 상고사를 떠올리지만 신화적 세계로 비약하지 않는 절제가 보인다. 곳곳에서 변경민의 척박한 삶에 주목하는 시선은 안재홍이 1920년대부터 『조선일보』에 여러 차례 연재한 전국 답사 기행들과 맥이 닿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