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살이전 ()

불가살이전 / 현영선
불가살이전 / 현영선
고전산문
작품
현영선(玄翎仙)이 지은 고전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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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현영선(玄翎仙)이 지은 고전소설.
내용

머리말에 의하면, 어느 여름 장마날 심심하여 이것을 적었다 한다. 허탄한 이야기들로 꾸며 놓으면 소설이 되겠기에 들었던 것들을 정리한 것이라 하면서 처음에는 제목을 ‘불가살의전기(不可殺議傳奇)’로 했다고 한다.

이 작품은 신유년 여름에 쓰고 중추에 광화문 앞에서 수정하였다는 점에서 1921년에 저작된 것으로 보여진다. 판본은 1921년 광동서관(光東書館) 발행본인 구활자본(舊活字本)이 전해올 뿐 이본은 보기 드물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건국과 전설적인 동물 불가살이를 관련시킨 이야기로, 고려 말 공민왕의 실정에서부터 신돈의 횡포가 자세히 그려져 있다.

반야의 오라비 기종랑이 반야를 찾아가 수일을 머물다 떠나려 하며, 점심을 먹은 뒤 식탁 밑에 흘린 물건을 주워 손바닥으로 비벼서 한 짐승을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이 조그만 짐승이 바늘을 집어먹고 몸이 점점 커져서 강아지만 해지더니 계속하여 쇠붙이라는 쇠붙이는 모두 주워 먹으면서 점점 더 커졌다.

그 때 이성계는 중원에 들어가 주원장과 의형제를 맺고 돌아왔는데, 고려 북방에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이성계로 장수를 삼아 물리치게 했다. 그런데 적장 아지발로라는 장군의 용병지술이 뛰어나 감히 당하지를 못하다가 이지란과 계책을 써서 이를 죽였다.

다음으로 적병을 섬멸하려 했으나 워낙 수가 많아 걱정하고 있었는데, 난데없는 괴물이 나타나 적의 무기를 모두 삼켜 버렸다. 이 괴물이 곧 동서양을 두루 다니며 모든 쇠를 삼켜 커질 대로 커진 불가살이였다.

이렇게 불가살이가 나타나는 곳마다 쇠붙이가 모두 없어지는 변고가 생겼는데, 이로 인해 이성계는 홍건적을 쉽게 물리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남방에 나타난 왜적들도 모두 무찌를 수 있었다. 이후 이성계는 개성에 들어가 신돈의 후손인 우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라 조선의 태조가 되었다.

그는 서울을 신도안으로 옮기려 했으나 때가 이르지 않았다 하여 무학대사를 찾아 모셔다가 한양에 궁궐을 짓고 도성을 쌓아 서울을 옮겼다. 그 뒤 준천관이 개천을 파다가 큰 바위를 하나 얻었는데, 거기에 언문이 모두 새겨져 있었다. 태종의 셋째 아들 세종이 이를 해득하여 한글을 짓게 되었다.

도성 십자로 중앙에 이층 누각을 지어 그 돌을 녹여 만든 종을 달아놓고 시(時)를 알리게 하니 이로써 백성이 때를 알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이 작품에 수용된 많은 전설적인 내용이 현지 조사에서 밝혀진 내용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전해 오는 설화를 바탕으로 작자 자신이 재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설화적 소재를 소설로 성립시켰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인정되며, 저작 연대로 보아 신소설과 같은 시기에 생산된 고소설적인 작품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갑오개혁을 중심으로 한 고소설의 하한연대 규정에 문제점을 던져주는 좋은 자료이며, 그 이후까지 고소설의 잔영이 계속 되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큰 작품이다.

참고문헌

「구활자본 고소설전집」(우쾌제, 『인천대학교 민족문화자료총서』1,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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