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흥군읍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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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서흥군의 연혁 · 인문지리 · 행정 등을 수록하여 1899년에 편찬한 읍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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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황해도 서흥군의 연혁 · 인문지리 · 행정 등을 수록하여 1899년에 편찬한 읍지.
내용

1책. 채색지도가 첨부된 필사본. 표지에는 ‘黃海道瑞興郡邑誌(황해도서흥군읍지)’로 되어 있다.

내용 구성은 건치연혁(建置沿革)·읍명(邑名)·관직(官職)·부치(府治)·강계(疆界)·방리(坊里)·산천(山川)·풍속(風俗)·성씨(姓氏)·인물(人物)·토산(土産)·진공(進貢)·민호(民戶)·전결(田結)·조적(糶糴)·늠봉(廩俸)·군액(軍額)·군기(軍器)·단묘(壇廟)·원우(院宇)·성지(城池)·진보(鎭堡)·관방(關防)·봉수(烽燧)·체발(遞撥)·교량(橋梁)·관우(館宇)·창고(倉庫)·역원(驛院)·장시(場市)·총묘(塚墓)·사찰(寺刹)·형승(形勝)·고적(古蹟)·고사(古事)·제영(題詠) 등으로 되어 있다.

이 읍지는 1828년(순조 28) 신상현(申常顯)이 편찬한 ≪서흥지 瑞興誌≫를 그대로 전사한 것으로 수록 내용은 1828년경의 읍세(邑勢)를 반영한다.

책머리에 서흥지목록(瑞興誌目錄), 신상현이 쓴 서흥지서(瑞興誌序), 1735년 박사창(朴師昌)이 쓴 원서(原序)가 실려 있어 읍지의 편찬 경위를 알려 준다.

편자는 서문에서 이전의 읍지가 매우 소략하기 때문에 박사창이 지은 휘규지서(彙規之書) 3편을 참고로 하고 새로 사실을 수집, 증보하여 이 읍지를 만들었음을 밝혀 놓아, ≪서흥지≫가 편자의 개인적인 관심에 의해 도임지에서 편찬된 읍지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박사창의 원서에는 “본 부(府)에는 이전에 읍지가 있었다.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정곤수(鄭崑壽)가 본도의 관찰사로 있을 때 본도의 문적(文籍)을 모았는데 본현의 지지도 그 속에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에 잃어버렸다.”라는 기록이 있어 1587년경에 이미 서흥부에 읍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연안읍지 延安邑誌≫ 외에도 임진왜란 이전에 황해도에서 편찬된 읍지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기록으로서 주목된다.

특기할 사항은 일반 읍지에는 없는 부치조를 특별히 설치하여 읍의 치소(治所)를동성(垌城)에서 대현산성(大峴山城) 밑으로, 다시 대니산(大尼山) 밑으로 옮긴 사실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점과 민호조에 1828년의 각 방(坊)별 호수를 기록하여 지역 내의 인구 분포 파악에 도움이 되도록 한 점이다.

그리고 고조사에는 1424년(세종 6) 서흥을 도호부로 승격시킨 윤봉(尹鳳)의 사적과 임진왜란으로 인한 피해와 복구 과정, 1671년(현종 12) 조대립(趙大立)이 부사 이우주(李宇柱)를 죽인 이유로 서흥도호부를 100년 동안 현으로 강등시킨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어 읍의 과거 사실들을 살필 수 있다.

이 읍지는 현전하는 서흥 지방의 읍지 중 가장 상세한 것이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참고문헌

『해서읍지(海西邑誌)』
『황해도전지(黃海道全誌)』
집필자
양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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