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식론고적기』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태현이 『성유식론』에 자신의 견해를 덧붙인 주석서인 불교 서적이다. 태현은 이전 시기 유식학자들의 주석을 참조하고, 거기에 자신의 견해를 추가하여 주석하였다. 태현이 많이 참조한 문헌은 규기의 『성유식론장중추요』, 원측의 『성유식론소』, 그리고 도증의 『성유식론요집』 등이다.
태현의 생몰연대는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우선 태현의 이름에 대해서 『삼국유사』를 포함한 한국과 중국의 문헌에서는 대현(大賢)으로 칭하는 경우가 많고, 일본의 문헌에서는 거의 태현으로 칭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태현은 경주 남산의 용장사에 머물렀는데, 절에 있던 미륵보살 석상 주위를 돌면 석상 역시 그를 따라 얼굴을 돌렸다고 한다. 또한 753년 여름 큰 가뭄이 들었을 때, 태현이 주1에 의해 내전에 들어가 『금광명경』을 강의하자, 대궐의 우물물이 솟구쳐 오르는 주2을 보이기도 하였다. 태현은 매우 방대한 저서를 남긴 인물이지만, 현재는 『성유식론고적기』를 포함하여 5종이 현존한다.
7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유식론고적기』는 『성유식론』을 3문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째는 현종출체문(顯宗出體門)으로, 『성유식론』의 종지를 드러내고 교체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둘째는 제명분별문(題名分別門)으로 『성유식론』이라는 명칭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셋째는 해석문의문(解釋文義門)으로 『성유식론』의 본문을 해석하는 부분이다.
첫째, 종지와 교체를 드러내는 부분에서 태현은 먼저 종지를 설명한다. 종지에는 크게 청변(淸辨) 등이 『반야경』에 의거하여 수립한 종지와 호법(護法) 등이 『해심밀경』에 의거하여 세운 종지의 두 가지가 있다. 『성유식론』은 이 중에서도 주3이 세운 유식중도(唯識中道)의 경(境) · 행(行) · 과(果)의 세 가지를 종지로 삼는다. 다음으로 교체를 보여주는 부분에서는 주4가 세운 4문, 원측이 세운 5문, 주5이 세운 8문을 소개하면서 부처님의 교설의 본질이 무엇인지 설명하였다.
둘째, 『성유식론』의 명칭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태현은 이 논이 ‘유식의 이치를 성립시키는 논’임을 설명하였다.
셋째, 『성유식론』의 본문을 해석하는 부분에서 태현은 전통적인 삼분과경(三分科經)의 구조에 따라 이 논을 교기인연분(敎起因緣分), 성교정설분(聖敎正說分), 결명회시분(結名廻施分)의 셋으로 나누었다. 교기인연분은 『성유식론』의 가르침이 일어나게 된 인연을 밝히는 부분이고, 성교정설분은 『성유식론』의 본문을 해석하는 부분이고, 결명회시분은 이 논의 명칭을 다시 한번 설명하고 이를 통해 얻은 주6을 중생들에게 보시하겠다고 서원하는 부분이다. 태현은 성교정설분을 다시 유식(唯識)의 경(境) · 행(行) · 과(果)의 세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성유식론』이 본래 주7이 지은 주8에 대한 인도 유식의 10대 논사들의 주석서를 다시 편찬한 것이기 때문에, 태현은 『성유식론』을 『유식삼십송』의 본문에 따라 셋으로 분류하였고, 앞의 25송은 유식의 경(境)을 설명하고, 그 다음의 4송은 유식의 행(行)을 설명하며, 마지막 1송은 유식의 과(果)를 밝힌 것이다.
태현의 『성유식론고적기』는 기존에 나온 『성유식론』의 여러 주석서를 참조해서 저술된 것이다. 여기에 중심이 되는 것은 규기의 『성유식론장중추요』, 원측의 『성유식론소』, 그리고 도증의 『성유식론요집』 등이다. 태현은 이들의 학설을 비교적 대등하게 인용하고 있으며, 특정 학자의 견해에 경도되지 않고 자신의 입장에 입각하여 냉정하게 평가를 내리고 있다. 또한 현장 이후 성행했던 불교 논리학인 인명학의 전통을 계승하여 『성유식론고적기』 내에서 선대 유식학자들의 논리학적 견해를 소개하고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이 문헌은 신라에서 진행된 유식학과 인명학 연구의 성과를 확인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