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황반 ()

시용향악보
시용향악보
국악
작품
국가유산
조선 중기에, 간행된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 소재 무가류 악곡 중 한 곡.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
분류
기록유산/전적류/목판본/사간본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보물(1971년 08월 30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로9길 10-10 (충정로2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성황반(城隍飯)」은 조선 중기에, 간행된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 소재 무가류 악곡 중 한 곡이다. 조성은 계면조이며, 노랫말은 사방을 지키는 제석천(帝釋天)의 부하 네 명의 신과 황금사목천왕에게 역귀(疫鬼)를 물리쳐 달라고 기원하는 내용이다.

정의
조선 중기에, 간행된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 소재 무가류 악곡 중 한 곡.
전승 과정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의 간행 연대는 성종 대부터 중종 대까지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그 수록곡의 생성 연대는 확인되지 않는다. 성황당(城隍堂) 혹은 서낭당의 원형은 상고시대 소도(蘇塗)로 추측할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성황(城隍)은 중국에서 건너온 제도로 후삼국시대궁예(弓裔, 재위 901~918)가 성황당을 수리, 관리하는 직책과 관서인 장선부(障繕府)를 설치하기도 했다.

고려 제11대 왕 문종(文宗, 재위 1046∼1083)은 1055년(문종 9), 선덕진(宣德鎭)에 성황 신사를 마련하고 ‘숭위(崇威)’라는 이름을 붙인 뒤, 봄과 가을에 소사(小祀)를 지내게 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성황단에 대한 제사는 명나라의 제도에 따라 중사(中祀)로 분류되어 풍운뇌우(風雲雷雨)와 4악(四嶽)과 함께 봉안되었다. 풍운뇌우와 산천, 성황에는 매년 봄, 가을 중엽 상순에 정1품관 주관으로 제사를 지냈다. 제사 절차에 따라 영신, 전폐, 초․아․종헌례와 철변두에 악무(樂舞)를 썼다.

조선은 국가의 공식적인 제의와는 별개로 4악과 명산대천의 신사(神祠)로 무격(巫覡)을 파견해 천재지변이 발생할 때마다 민심을 안정시키는 방편으로 제의를 지냈다. 민간에서는 영험하다는 지역에 있는 성황당에 백성들이 무당을 동원해 밤낮없이 가산을 탕진하면서까지 드나들었다. 특히 개성시 송악산에 있는 성황당들이 영험하다고 소문이 나서 그곳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태종은 1412년(태종 12)에 송악(松嶽)의 성황에 기도하러 가는 것을 금지했지만, 조선 중기까지 송도(松都) 송악산은 무속이 성행했다. 어숙권(魚叔權)『패관잡기(稗官雜記)』에서 영험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도 없는 데도 사람들이 무당에게 미혹되어 가산을 탕진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어숙권의 『패관잡기』와 『명종실록』에서 언급되었던 성황사 혹은 서낭당에서 국가에서 보낸 무격이 제의를 설행할 때 부르던 무가가 「성황반(城皇飯)」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성 및 형식

「성황반」은 6대강으로 나뉘어진 16정간 72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1행 3대강부터 시작되며 72행 1대강으로 마무리된다. 시작음과 끝음은 동일하게 궁(宮)이다. 장단형은 편(박)-쌍-고(박)이며 조성은 계면조이다. 「성황반」 형식에 대한 기존 설명은 선율의 반복 및 엽(葉)에 의해 곡이 8부분으로 나뉘어지고 이를 A-A-A′-B-C-A′-B′-D의 형식이라고 해석한다.

이를 좀더 구체적인 분석해보면, 「성황반」 전반에는 음악적 긴장감을 줄 수 있는 당김음(syncopation)이 장치되어 있다. ① 3대강부터 시작함으로써 강박과 약박의 위치를 바꾸고 ② 음높이가 같은 음을 다른 대강으로 연장시킴으로써 뒤에 위치한 음이 더 잘 들리도록 하는 효과를 주고 있다. ③ 또한 한 대강에 위치한 두 음 중 앞선 음의 길이를 뒤따라오는 음의 길이보다 짧게 함으로써 음악적 긴장감을 발생시킨다. 「성황반」에 보이는 음악적 특징은 『시용향악보』에 수록되어 있는 무가류 악곡에서 공통적으로 관찰되며 세계 민속음악의 특징이기도 하다. 단, 몇몇 무가류 악곡에서 보이는 10도 이상 하행하는 종지 선율은 「성황반」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내용

노랫말은 동서남북 사방의 신을 호명하고 덧붙여 황금사목천왕을 부르는 돈호법으로 표현되어 있다. 수미산을 중심으로 동쪽을 지키는 지국천왕, 서쪽을 지키는 증장천왕, 남쪽을 지키는 광목천왕, 북쪽을 지키는 비사문천왕은 제석천(帝釋天)의 부하로 사방을 지키는 선신(善神)이다. 제석천은 인도 힌두교 경전 『리그베다(Rigveda; 산스크리트어: ऋग्वेद)』에 등장하는 10왕 중 한 명으로 인드라라고 한다. 「성황반」에서는 남방의 증장천왕과 서방의 광목천왕을 바꿔부르고 있다. 황금사목천왕을 다섯 방위 중 중앙을 다스리는 신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황금사목은 나례(儺禮)를 설행할 때 역귀(疫鬼)를 축출하는 방상씨(方相氏)가 쓰는 가면이므로 「성황반」의 내용은 역귀 축출로 짐작된다. 「성황반」 노랫말 내용은 불교와 무속이 결합하여 있는 무가(巫歌)로, 민심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국가에서 전국 각지 명산과 대천으로 파견한 무격(巫覡)이 성황당에서 연행했던 노래다.

동방애 지국천왕(持國天王)님하 (여음)
남방(南方)애 광목천자천왕(廣目天子天王)님하 (여음) 증장천왕
남무서방(南無西方)애 증장천왕(增長天王)님하 서방
북방산(北方山)의ᅀᅡ 비사문천왕(毗沙門天王)님하 (여음)

다리러 다로리 로마하 (여음)
디렁디리 대리러 로마하
도람 다리러 다로림디러리
다리렁 디러리 (여음)

내외(內外)예 황사목천왕(黃四目天王)님하 (여음)

관련 민속

관련된 민속으로는 안동서지리성황당, 안산 잿머리 성황제, 시흥 구준물 성황제, 군자봉 성황제, 순창성황제, 서울가양동성황제, 영주읍내리성황제 등이 있다.

의의 및 평가

「성황반」은 천재지변에 동요하는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명산대천으로 나라에서 파견된 무격이 성황당에서 제의를 올리며 불렀던 무가로,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조선의 여론 정책이 무속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
『국조오례의』 
『국조오례의서례』
『명사』
『삼국사기』
『삼국지』
『조선왕조실록』
『후한서』

단행본

국립국악원, 「금합자보, 시용향악보, 동대금보, 동대가야금보, 동대율보」 (『韓國音樂學資料叢書』 22. 국립국악원, 1979)
이 욱, 『조선시대 재난과 국가의례』 (창비, 2009)
정승석 편역, 『리그베다』 (김영사, 1984)
최종성, 『(조선조) 무속 국행의례 연구』 (일지사, 2002)

논문

김동욱, 「時用鄕樂譜 歌詞의 背景的硏究」 (『震檀學報』 17, 진단학회, 1955)
김영주, 「『시용향악보』 소재 무가류 악곡 수록배경 연구」 (『한국예술연구』 35, 한국종합예술원, 2022)
윤아영, 「시용향악보 간행 배경 재고(再考)」 (『동양음악』 43, 서울대학교 동양음악연구소, 2018)
이병기, 「時用鄕樂譜의 한 考察」 (『한글』 115. 한글학회, 1955)
임재해,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 소재 무가류시가연구」 (『韓民族語文學』 9, 한민족어문학회, 1982)
황준연, 「時用鄕樂譜 鄕樂曲의 年代」 (『한국공연예술연구논문선집』 4,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2001)

인터넷 자료

한국민속대백과사전
한국민족대백과사전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