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습(世襲)은 사회적 가치 및 자원의 세대 전승(傳承)이 혈연 등 사적(私的) 원리에 의해 이루어지는 현상이다. 근대사회에 들어와서 정치권력의 세습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거의 사라지고 금기시되었다. 반면에 경제력의 세습은 사유재산과 더불어 근대 자본주의의 등장 이후 법제화되었다. 그에 따른 부의 편중을 방지하기 위한 다양한 장치가 존재하지만, 경제성장이 둔화된 시대에 점점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인간 사회가 당대까지 이룬 성과를 버리지 않고 다음 세대로 전승(傳承)하는 것은 사회의 지속을 위해 필수적이다. 여기에는 전체 사회의 특정 영역이나 기능을 담당할 인재를 찾는 사회 측의 작용과 더불어, 개인 측에서는 각자의 생존과 성취를 위해 여러 가지 사회적 가치와 자원을 얻고자 하는 활동이 수반된다. 이 같은 사회의 작용 및 개인의 활동이 일어나는 방식에는 경쟁을 통한 것도 있지만, 보다 안정적인 전승 혹은 여타 이유로 인해 공적인 경쟁을 배제하는 방식이 활용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후자의 경우를 세습(世襲, hereditary succession)이라고 한다.
이런 세습 현상은 인류 문명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 사회에 보편적으로 발견된다. 특정 직업이 혈연이나 가족 관계를 따라 전승되는 것은 비교적 익숙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세습의 대상이 되는 영역이나 기능은 인간이 형성한 모든 공적인 제도에 걸쳐 있다. 편의상 크게 정치, 경제, 사회 영역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정치 권력의 세습은 한때의 고대 그리스‧로마에서와 같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 대다수 전근대 국가의 정치제도에서 가장 기본적인 형태를 이룬다. 군주권만이 세습의 대상인 경우도 있지만, 권력이 분산된 사회의 경우 그 분산된 권력을 따라 광범위한 지역, 영역에 걸친 세습 현상이 발견되기도 한다. 근세 이후 중국이나 조선의 지방 정치권력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임명직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던 반면, 서유럽이나 일본의 봉건제하에서는 지역의 영주 권력이 세습되었다. 또한, 중국이나 조선에 있어서도 고대의 경우 집안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관직이 많았었지만, 점차 그러한 세습직의 비중이 줄어들었다.
한국 사회에서 조선 왕조의 멸망 이후 중앙 정치권력의 세습 현상은 사라졌다. 1920년 3‧1운동으로 수립된 임시정부의 국체(國體) 제정 논의에서 입헌 군주정의 의견은 전혀 나타나지 않고 공화제가 당연시되고 있었던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정치 권력이나 국가 상징의 세습에 대한 거부감은 이미 그 이전부터 일반화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사회주의화 이후 북한은 주체사상이나 ‘수령론’ 등의 논리로 새롭게 중앙 정치권력의 세습을 제도화하였다. 또한, 가업 승계 의식이 강한 일본 사회에서 의원직(議員職)이 가업(家業)으로 인식되는 경우도 관찰된다.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현대사회에서 정치권력의 세습은 약화되는 추세이거나 이미 약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치권력의 세습이 약화된 결정적인 요인에는 현대 민주주의 정치 제도의 특징인 주권재민 이념이나 참정권 범위의 확대가 있다. 일찍이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De l'esprit des lois, 1748)에서 세계 각국의 정치 제도를 전제정, 군주정과 공화정으로 나누고, 공화정에서도 정치의 담당 주체가 소수인 경우와 다수인 경우가 있을 수 있다고 한 바 있다. 루소의 사회계약 사상 및 그에 영향을 받은 정치혁명 이후 일반화한 주권재민의 이념에 따라 전 국민 보통 선거 원칙과 보편적 피선거권 인정은 현대 정치 이념의 기본을 이루게 되었고, 이는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 등 각국의 참정권 확대 운동으로 제도적 진전을 보았다. 이 과정에서 사적 원리에 의한 정치권력의 전승은 크게 제약되게 되었다. 한국의 중앙 정치제도의 경우, 해방 후 처음으로 치러진 5‧10 총선에서부터 곧바로 보편적 참정권 원칙이 관철되었다.
경제 영역에서 세습 현상은 이와 대조된다. 정치 영역에서 전근대 시대에 확립된 세습 관행이 이후 근대사회로 올수록 점차로 해체되는 경향이 있었던 반면, 경제 영역에서 사적 소유권과 사유재산의 세습 원칙이 국가의 보편적 보증을 수반하는 명확한 법적인 제도화를 이룬 것은 근대사회에 들어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전근대 사회에도 사유재산과 그것의 세습 관행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서, 농업 사회에서 기본 생산수단인 토지 소유권을 살펴보면, 통일신라, 고려시대의 양반전, 군인전 등 호강한 관료나 귀족의 사전(私田)이 세습되거나 매매되었다는 기사를 확인할 수 있다. 또, 일반 백성이 개간해서 소유하는 민전에 대한 관습적 소유권과 세습권이 인정되는 사례도 관찰된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 왕조에 들어와서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토지에 대한 사유 재산권과 세습권은 강력한 권위에 의한 궁극적 보증이 불완전했기 때문에 자기가 개간을 한 토지라 하더라도 그것의 소유권을 영구적으로 주장하기가 쉽지 않았고, 다시 그것을 버려두어 황무지가 될 경우 분쟁의 실마리가 생겼다. 강한 세력이 지역적 권력을 이용하여 소유권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잔약한 백성에게는 이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농업기술의 발전과 활발한 매매 관행 등으로 인해 점차로 사적 소유권을 인정하는 관행이 사회 전체에 퍼져 나갔으리라 생각되며, 개별 토지에 대한 관(官)의 인증이나 국가적 양전(量田) 등이 토지 소유권의 안정성에 기여하였다. 하지만, 그것의 시대별 추이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이 존재한다.
사유 재산에 대한 세습은 근대 이후 자유 민주주의 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제도이다. 대한민국의 헌법 역시 기본적으로 사적 소유와 이를 통한 부의 대물림을 허용하지만(헌법 제119조 1항), 이로 인해 생겨날 수 있는 부의 편중을 막고 부(소득, 재산)의 재분배를 도모하기 위해 경제 민주화 조항(헌법 제119조 2항)을 설치하고 또한 상속, 조세 등에 대해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여러 법률 조항들도 마련하고 있다.
전후 자본주의의 호황기가 끝나고 성장이 둔화된 오늘날, 부의 세습은 갈수록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한국의 경우, 경제위기를 지나면서 일부 글로벌 기업화한 재벌의 소유권과 경영권이 여전히 특정 집단에게 세습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보완하는 것에 대한 목소리가 높다. 또한, 이른바 ‘수저 계급론’ 등 경제적 세습과 불평등의 관계에 관한 대중적 관심도 커져 가고 있다.
사회 영역에서는 사회적 가치, 자원 및 그에 따른 사회적 지위의 세습이 중요한 문제이다. 개인들은 사회 속에서 경제적 부나 정치적 권력 이외에도 다양한 사회적 가치와 자원을 추구하며 이를 통해 사회적 지위(social status)를 높이려 한다. 사회적 지위(social status)는 정치, 경제적 자원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나, 그것으로 완전히 환원되지 않는 위신(privilige)이나 명예, 즉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도 포함한다. 여기서 사회적 자본이라는 것은 개인 측면에서 볼 때, 통상의 의미처럼 어떤 개인이 가지고 있는 인맥 자원뿐만 아니라 그가 가진 학력이나 품성, 자질 등 문화자본까지도 포함한 말이다. 개인을 둘러싼 다양한 사회적 관계와 집단들이 사회적 자본과 지위의 원천이 되므로 그것의 획득과 지배를 둘러싼 세습 문제가 존재한다.
사회적 지위가 세습될 경우 이를 ‘신분’이라고 부른다. 신분은 인도의 악명 높은 카스트 제도처럼 종교적 권위 같은 것에 의해 정해진 경우도 있고, 유럽 중세 봉건제의 경우처럼 경제 관계와 밀접히 연관되어 구조화된 경우도 있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자주 언급되는 것이 직업이다. 어떤 개인이 주업(主業)으로 삼는 일은 그가 사회 속에서 소속된 단체나 타인과 맺고 있는 관계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전근대사회의 직업은 세습되는 경우가 많았으나, 근대사회 이후 그것은 개인의 성취에 따른 것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나 전근대사회에서도 사회적 지위의 귀속성이 절대적인 것만은 아니다. 다만 개인을 둘러싼 구조적 제약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역으로 근대사회에서 사회적 지위가 오로지 개인의 성취에만 달려 있는 것도 아니다. 개인의 능력 역시 사회의 구조 속에 영향을 받는다는 인식도 존재한다.
한국의 전근대사회에서도 기본적으로는 사회적 지위의 세습이 사회 구조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었다. 신라에는 골품제가 있었고, 고려는 귀족사회였으며, 조선은 사족(양반) 신분이 존재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신라시대의 골품제가 후대에 이어지지 않았고, 음서제의 비중과 중요성이 컸던 고려에 비해 조선에서는 음직(蔭職)의 비중과 중요성이 낮고 유교적 능력주의 제도인 과거제가 강화된 것에서 보듯이 적어도 사회의 상층부에서는 사회적 지위의 세습 경향이 갈수록 완화되는 과정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조차 사회적 지위를 크게 독점하고 세습하는 벌열이라는 집단이 형성되기도 했다. 조선 후기 경화거족 중심의 벌열들은 공식적인 과거 제도 속에서도 별시나 직부전시(直赴殿試) 등 다양한 방식으로 특권을 창출했고 이를 가문을 통해 세습했다. 서북인을 위시하여 문벌이 낮은 집안 출신의 경우 과거에 급제하더라도 분관(分官) 및 초입사(初入仕)에서부터 암묵적인 차별을 받았고 관료제 사다리를 올라가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처럼 한국 전근대사회에서 사회적 지위 세습의 실상에 대해 여전히 불명확한 점이 많다. 이와 관련된 당대인들의 논설도 혼란스럽다. 조선 후기의 경우, 사회적 지위의 불평등을 비판하는 실학자들의 논설도 많지만, 정약용의 경우처럼 기강이 크게 무너진 당대의 혼란상을 해결하기 위해 귀천(貴賤)의 차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어디까지나 상층사회에 한정한 이야기이다. 하층사회에 대해서는 예컨대 직업의 세습 정도가 시대별로 어떠했는지 등을 여전히 알지 못하는 바가 많다.
한국 전근대사회에서 하층 신분과 관련하여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노비 계급의 존재이다. 이들에게는 사회적 오명(stigma)과 인신매매라는 반인륜적 처우가 세습되었다. 법적인 규정이 존재하지 않는 엘리트 신분과는 대조적으로 노비의 사회적 지위와 그것의 세습은 법적으로도 명확했다. 이것은 동시대 지구상에서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기이한 제도로서 갑오개혁으로 폐지되기 전까지 존재하였고, 오늘날까지도 조선 사회의 불명예로 남아 있다.
오명의 세습이라는 점에서 조선 전기 이래 존재했던 서얼(庶孼) 차별 제도 역시 주목된다. 서얼이란 첩의 자식을 의미하는데, 중국과는 달리 모측(母側, matrilateral)의 신분이 사회적 결정력을 가진 조선 사회의 특성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경국대전』은 서얼에게 과거 응시 자격이나 주요 관직 자격 등 공민권을 박탈하고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관련인들의 저항 그리고 서얼 가계의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남에 따라 서얼의 정치적 ‘금고(禁錮)’가 해제되었다. 그러나 사회적 차별과 오명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특히, 서얼은 그 지위가 당대에 끝나지 않고 영구히 세습된다는 점이 독특했다. 즉, 조상 중에 단 1명이라도 ‘서얼’이 있을 경우 그 후손은 누대에 걸쳐 서얼 집안으로 하대(下待)받았다. 이것은 순수 혈통 세습을 통해 내부 집단을 공고히 했던 지배층 구조의 이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결과 서얼 인구의 증대로 인해 역설적으로 서얼 차별의 정치적 효과는 감소되게 된다. 갑오개혁 이후 서얼 금고와 차별 제도가 법적으로 폐지되었고, 윤치호 등 서얼 출신 엘리트들이 정계의 거물로 등장하는 등 사회적 오명도 점차 사라져 갔다.
여기서도 알 수 있지만, 조선 후기 사회적 지위와 관련하여 가계(lineage) 계승의 문제가 매우 중요하였다. 일제강점기 초기 총독부의 『관습조사보고서』에는 조선의 상속에 제사 상속, 재산 상속, 호주 상속 등이 있다고 보고되고 있는데, 특히 제사 상속의 중요성이 크게 다뤄지고 있다. 에도 시대 말기 이래 일본의 경우, 이에(家)가 사회의 기본 단위가 되어서 그 대표자인 호주의 권력이 매우 컸다. 중국의 경우, 종족 제사의 대상인 가묘(家廟)가 종족 마을 한가운데에 위치하는 것에서 보듯이 종족이 하나의 단체로 세력화하고 있었다. 한국의 경우, 제사의 계승이 장손(長孫) 1명의 계보를 타고 이어진다는 특성이 있다. 이것은 전근대의 여타 국가들과 구별되는 한국 사회의 사회적 지위 세습의 특성과도 관련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가계 계승의 방향도 문제가 된다. 고려시대는 가계 계승이 부계(partilineal)에 못지 않게 모계(matrilateral)을 통해서도 이뤄지는 양측적(bilateral) 사회였다고 할 수 있는 반면, 조선 후기 이후가 되면 많은 사회적 자원들이 부계 일방으로만 전승되는 경향이 강화된다. 이것은 상속 제도의 역사에서 잘 관찰되는데, 『경국대전』에 규정된 바 조선의 상속 제도는 남녀가 고르게 나누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고, 실제 상속 관행에 있어서도 17세기 전반기까지는 남녀 평등적 성격이 비교적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제사와 재산 상속에서 부계 전승이 두드러지게 된 것은 조선 후기부터의 경향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이에(家) 제도가 유입된 이후 가족 제도에서 호주권과 남성 호주 승계의 절대성이 강화되었다.
현대사회에서 명시적인 사회적 지위의 세습은 약화되었다고 할 수 있고,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금기시되고 있다. 그러나 학력과 인맥 등 사회적 자본을 매개로 한 지위의 세습은 현대사회에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 토마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에서 역사적으로 자본 수익률이 언제나 노동 수익률을 상회해 왔다고 주장하였다. 자본에 대한 지배와 전승이 사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한, 이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경제적 세습 문제는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교육을 통해 형성되는 ‘인적 자본’의 세습도 마찬가지이다. 자본주의의 성장이 정체되고 새로운 활로가 찾아지지 않는 시대가 되자 경제적 부와 사회적 지위의 세습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 한국사회에 회자되는 ‘수저 계급론’은 이 같은 현상에 대한 대중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약하자면, 세습이라는 현상은 인간 사회가 축적한 문명을 다음 세대로 전승하는 과정에 나타나는 현상이므로 정치, 경제, 사회의 제 분야에 걸쳐 보편적으로 일어날 수 있고, 또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긍정적 또는 부정적 효과를 가지고 있으며, 그 세습 대상도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 모두 존재한다. 근대 사회에 들어와서 정치적 권력의 세습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거의 사라지고 금기시되었다. 반면에 경제적 세습은 근대 자본주의의 등장 이후 최종적으로 법제화되었다. 그에 따른 부의 편중을 방지하기 위한 다양한 장치가 존재하지만, 경제 성장이 둔화된 시대에 부의 대물림 현상이 점점 문제가 되고 있다. 사회적 지위가 세습되는 현상을 신분제라고 한다. 현대사회에서 신분제는 금기시되어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교육과 인적 자본의 세습이라는 형태로 여전히 존재하며, 최근 부의 대물림이 확대되는 것에 병행하여 더욱 큰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