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궁은 조선시대 왕세자의 처소, 혹은 세자의 여관이다. 세자궁은 동궁 · 동궁전이라 칭했으며, 세자가 거처하던 활동 권역이다. 이곳에는 세자의 관속으로 세자시강원과 세자익위사를 배치하였다. 한편, 세자궁은 이곳에 소속된 여관을 지칭하기도 한다. 여관은 종2품 양제 이하 종5품 소훈까지 내궁과 종6품 수규 · 수칙 이하 궁관으로 구성되었다.
세자궁(世子宮)은 경복궁 창건 당시에는 궁궐 내에 있지 않았고, 세자는 궁궐 밖 다른 곳에 머물렀다. 세종 대 세자 관련 의례를 정비하면서 궁궐 내에 조성되었다.
1427년(세종 9) 경복궁 정전 동쪽에 세자궁으로 자선당(資善堂)이 지어졌으며, 이후 세자가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면서 계조당(繼照堂)과 승화당(承華堂)이 조성되어 계조당에서 조참(朝參)을 받고, 승화당에서 정사(政事)를 보도록 하였다.
창덕궁에는 1690년(숙종 16) 희정당(熙政堂) 동남쪽에 성정각(誠正閣)이 만들어져 세자의 서연(書筵)이 이곳에서 열렸으며, 1782년(정조 6) 정조가 문효세자의 정당으로 중희당(重熙堂)을 건설하였다.
창경궁의 동궁(東宮)은 창덕궁과 만나는 곳에 자리하였다. 창경궁의 세자궁 정궁은 저승전(儲承殿)이었고, 서연이나 업무를 보는 곳으로 시민당(時敏堂)을 이용하였다.
경희궁은 1760년(영조 36) 경덕궁에서 경희궁으로 명칭을 바꾸었으며, 경현당(景賢堂)에서 세자의 하례와 회강(會講)이 이루어졌다. 경현당은 동궁의 정당이었다가 영조가 편전(便殿)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고종 대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세자궁도 이때 다시 건설되었다. 1867년(고종 4) 자선당이 조성되었고, 이듬해 계조당이 완성되었다.
세자궁에는 세자의 관속으로 설치되었던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과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도 함께 있었다. 춘방(春坊)이라 불렸던 시강원은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관서였고, 계방(桂坊)으로 불린 익위사는 세자의 호위를 담당하는 곳이었다.
경복궁에는 비현각(丕顯閣)의 남쪽에 춘방과 계방이 있었다. 비현각은 사정전 동쪽에 건설되었던 세자궁 편당(便堂)이었다. 창경궁에는 시민당 동쪽에 춘방이 있었으며, 경희궁에는 경현당 일대에 춘방과 계방이 있었다.
한편, 세자궁에 소속된 여관(女官)을 세자궁이라고도 한다. 1430년(세종 12) 세자궁 관제를 옛 제도를 참고하여 내관(內官)과 궁관(宮官)으로 정비하였다.
세자궁의 내관은 종2품 양제(良娣), 종3품 양원(良媛), 종4품 승휘(承徽), 종5품 소훈(昭訓)까지이다. 이들은 세자의 후궁에 해당하며, 세자빈(世子嬪)이 폐빈되거나 사망하였을 때 세자빈으로 승차(陞差)하기도 하였다.
문종의 왕비이며, 단종의 모후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 權氏)는 세자궁 승휘(承徽)에서 양원(良媛)으로 승차한 후 문종의 세자빈이었던 순빈 봉씨가 폐출되자 세자빈으로 승차하였다. 예종의 왕비 안순왕후 한씨(安順王后 韓氏)는 세자궁 소훈(昭訓)이었다가 세자빈이었던 장순왕후 한씨(章順王后 韓氏)가 사망하고, 이후 예종이 즉위하였을 때 세자궁에서 왕비로 승차하기도 하였다.
세자궁 궁관은 세종 대 정비한 후 수정을 거쳐 『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법제화되었다. 궁관은 종6품 수규(守閨) · 수칙(守則), 종7품 장찬(掌饌) · 장정(掌正), 종8품 장서(掌書) · 장봉(掌縫), 종9품 장장(掌藏) · 장식(掌食) · 장의(掌醫)로 정비되었다.
세자궁은 조선시대 왕세자가 거처하던 처소이며 활동 권역이다. 또한, 세자의 권역에 소속된 여관을 지칭하기도 한다. 차기 왕위 계승자를 세자(世子)로 칭하게 된 것은 1434년(세종 16) 왕실 구성원들의 위호(位號)를 정비하면서였다.
이때 세자의 궁전을 세자궁, 또는 동궁이라 칭하게 되었는데, 세자궁은 동궁전(東宮殿)이라고도 불리었다. 세자로 칭하기 전부터 세자를 동궁이라 칭하였고, 동궁전 역시 세자를 지칭하였다.
세자궁은 궁궐 정전(正殿)의 동쪽에 자리하기 때문에 동궁이라 부른 것이며, 세자는 장차 왕위를 계승할 인물이기 때문에 봄이 만물이 피어나는 것으로 비유하여 춘궁(春宮)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세자궁은 왕위 계승자로서 세자의 공간과 여관을 정한 것으로, 이는 세자의 지위를 확고히 해 주고 그 위상을 강화하는 의미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