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후기에, 도승지, 대사헌, 함경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1715년(숙종 41) 부교리로 있으면서 소장(疏章)의 출납에 대한 내의원(內醫院)의 방금(防禁)이 심하다고 했다가 파직되었다. 이듬해 복직되어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을 거쳐 이조좌랑이 되었으나 계언(啓言)이 왕의 비위를 거슬려 파직되었다. 그 뒤 1717년에 보덕(輔德), 1719년에 사인(舍人)으로 임명되었다.
경종 즉위년인 1720년에 부응교·동부승지가 되었는데 정치의 득실을 상소하다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723년(경종 3)에 승지·대사성, 그리고 황해감사를 역임했고, 영조 즉위 후 다시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또한 실록청당상(實錄廳堂上)으로 제수되어 『숙종실록(肅宗實錄)』 개수에 참여하였다.
이 해에 진주부사(陳奏副使)로 청나라에 가서 명(明)의 『태조실록(太祖實錄)』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태조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잘못 기재된 것의 정정을 요구하였다. 이듬해에는 우윤·이조참판·부제학에 임명되었고, 1729년(영조 5)에는 형조참판·대사성에 임명되었다. 사은부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가 곧 호조참판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에는 공조참판·동경연(同經筵)·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731년에는 되었고, 도목정사(都目政事: 관리들의 근무 성적을 평가하던 제도)을 실시하여 공조판서로 임명되었고 반송사(伴送使)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이듬해에는 대사헌·판윤·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예문관제학 겸 예조판서를 거쳐 대사헌을 지냈다.
1735년에는 좌참판을 거쳐 함경도관찰사에 임명되었고 임기 동안 도내에 문학을 권장하여 교육을 진흥할 것을 상소하였다. 1736년에는 공조판서로 임명되고 그 뒤 좌참찬·대사성·좌참찬에 거듭 임명되었다. 1739년에 다시 공조판서에 이어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문명이 있었으며, 저서로 『송석헌집(松石軒集)』과 편서인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이 있다.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호보(號譜)』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몽와집(夢窩集)』
- 『한포재집(寒圃齋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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