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도는 고려 시대 개경에 있었던 12개 사학(私學)을 말한다. 12도는 1055년(문종 9) 최충이 사숙을 열어 후진을 양성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 사숙은 ‘시중 최공도’, ‘문헌공도’, ‘9재학당’ 등으로 불렸다. 교과목은 국자감과 거의 같은 구경(九經), 삼사(三史), 제술 등이다. 이에 다른 유학자들도 문도를 모집하게 되어, 12개의 사학이 설립되었다. 12도가 발전한 이유는 국학의 역할이 부진하고, 과거급제에 치중했던 사회 풍조 때문이다. 12도는 고려 시대의 사립 고등교육기관으로서 문종대부터 고려 말까지 360여 년간 고려 교육의 진흥에 크게 공헌하였다.
설립된 시기는 각각 다르나 주로 문종 이후에 설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2공도의 시초는 1055년(문종 9) 벼슬에서 물러난 최충(崔沖)이 자신의 집 사랑채에 사숙(私塾)을 열어 후진을 양성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에 그의 명망을 듣고 학도들이 운집하자, 악성(樂聖) · 대중(大中) · 성명(聖明) · 경업(敬業) · 조도(造道) · 솔성(率性) · 진덕(進德) · 대화(大和) · 대빙(待聘) 등 9개 반으로 나누어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이를 9재(九齋)라 하였다.
그가 설립한 이 사숙은 관명을 붙여서 시중(侍中) 최공도(崔公徒) 또는 문헌공도(文憲公徒) · 9재학당(九齋學堂) 등이라 불렸다. 교과목은 국자감(國子監)과 거의 같은 구경(九經)과 삼사(三史) 및 제술 등을 주로 하였으며, 매년 여름철이면 귀법사(歸法寺)의 승방을 빌려 특별강회인 하과(夏課)를 열었다. 여기에서는 급제하고도 관직에 취임하지 못한 우수한 선비를 골라 학생들을 교도하게 하였다.
당시 관학인 국자감이 부진하여 과거에 응시하고자 하는 이들이 권위 있는 유학자가 세운 이 사학으로 모여들었으며, 이들 수학자들의 학문과 예의범절 등에서 교육 성과가 뛰어나자, 다른 저명한 유학자들이 각기 문도를 모집하게 되었다. 이로써, 문헌공도를 포함, 12개의 사학이 설립되어 이를 12도라 하였다. 각 사학의 명칭은 설립자의 시호나 호, 벼슬이름을 딴 것으로, 이들 12도의 명칭과 설립자를 살펴보면 〈표〉와 같다.
명칭 | 관명 | 설립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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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공도(文憲公徒) | 시중(侍中) | 최충(崔沖) |
홍문공도(弘文公徒) | 시중(侍中) | 정배걸(鄭倍傑) |
광헌공도(匡憲公徒) | 참정(參政) | 노단(盧旦) |
남산도(南山徒) | 좨주(祭酒) | 김상빈(金尙賓) |
서원도(西園徒) | 복사(僕射) | 김무체(金無滯) |
문충공도(文忠公徒) | 시중(侍中) | 은정(殷鼎) |
양신공도(良愼公徒) | 평장(平章) | 김의진(金義珍) |
정경공도(貞敬公徒) | 평장(平章) | 황형(黃瑩) |
충평공도(忠平公徒) | 류감(柳監) | |
정헌공도(貞憲公徒) | 시중(侍中) | 문정(文正) |
서시랑도(徐侍郞徒) | 서석(徐碩) | |
구산도(龜山徒) | 미상 | |
〈표〉 십이도 |
12도의 교육 수준은 문헌공도와 같이 국자감과 비슷한 정도였으며, 국가에서 수시로 12도의 교육을 감독하고 논밭 등을 하사하였다. 그 밖에 자세한 교육방법과 운영에 관해서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상세히 알기가 어렵다. 당시의 관학과 사학은 모두 관료를 위한다는 목적 아래 국가의 통제하에 운영되었으므로, 12도 역시 점차 과거를 준비하는 예비학교와 같은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12도가 성립되고 크게 발전하게 된 이유는 대략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국학(國學)의 부진을 들 수 있다. 고려시대 전반에 걸쳐 내우외환이 계속되어 국가의 문화활동과 장학정책이 부진하게 되자, 국자감의 학관(學官) 역시 실력이 없거나 열성이 없는 자들이 맡게 되어 학생들로 하여금 학업에 태만하고 의욕을 상실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에 따라 학력이 높은 유학자들이 후진 양성을 위한 열의로 교육의 장을 마련하자, 자연 면학에 뜻을 둔 많은 젊은이들이 이곳으로 몰리게 된 것이다. 또한 나말여초의 정치적인 혼란으로 많은 선비들이 산속으로 은거하였는데, 12도는 이들을 다시 불러모아 세상으로 환원시키는 데도 일익을 담당하여 관학을 대신해서 학문을 진작시키는 데 큰 구실을 하였다.
둘째로는 과거에 치중하는 사회풍조를 들 수 있다. 당시 국가의 교육정책은 유교적 이념에 충실한 유능한 인재 및 관리 양성에 있었으므로, 대부분의 유학자들은 과거급제의 수단으로 학문을 닦아 국가에서 요구하는 인재로 발탁되고자 하는 것이 최대의 목표였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최충 등 사학의 설립자는 대부분 과거 출신의 권위 있는 지도자였으며, 지공거(知貢擧)로서 실제로 인재를 선발해 온 경력자였기 때문에 자연 과거 지망생들이 12도로 몰리게 된 것이다. 이들이 과거장을 독점하게 되고 관계 진출이 활발하게 되어 12도는 대성황을 이룬 반면, 관학(官學)은 더욱 더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예종대에 와서 국학에 칠재(七齋)를 설치하고, 인종대에는 관학진흥에 더욱 힘써 국자감을 정비했으며, 1133년(인종 11)에는 각 도(徒)의 학생이 이유 없이 다른 도로 옮겨가는 것을 금하여, 이러한 자들에게는 동당감시(東堂監試)에 응시할 자격을 박탈하였다. 이와 같은 제재를 가한 것은 당시 각 도 사이에 이유 없이 전도(轉徒)하는 학생 수가 많아 폐단이 따랐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1139년에는 동당감시 후 각 도의 학생에게 국자감에서 50일간 학습하고 접사(接寺) 30일개(日開), 제술(製述) 15수(首) 이상을 습업(習業)한 다음, 각자 자기 이름 아래 접사한 일수와 사시(私試)한 제술 수수(首數)를 기입하여 보고한 뒤 과거에 응시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국학 진흥과 12도의 제재로 인한 동요가 있었으나, 얼마 가지 않아 다시 국학은 침체하고 12도는 여전히 지속되었다. 그 뒤 무인의 난과 몽고 침입을 겪으면서 원나라와 밀착된 관계를 갖게 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충렬왕 이후 국학이 크게 진흥되어 12도는 점차 국학의 예비과정으로 약화되었다. 이로써 12도는 1391년(공양왕 3)에 교육제도의 정비과정에서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