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사별 후 근검 · 절약하여 10년 만에 전답을 배로 늘렸다. 그녀는 200석의 토지를 경작하며 재산을 모아 1년에 6,000석을 수확하는 대지주가 되었다. 일찍이 장남 이승조와 함께 교육에 관심을 두었다. 장남은 서북학회 회원이었다. 1910년 한일병합을 즈음하여 딸과 사위가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장남이 사망하자 충격에 재령 개선 등을 전전하였고 1925년에야 신천에 정착하였다.
1926년부터 빈민 구호와 교육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장손 이계천도 경신학교 등에 거액을 기부하면서 교육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왕재덕은 1929년에 2만여 원의 돈을 희사하여 1930년 신천농민학교를 설립하고, 해마다 5,000여 원을 학교 운영비로 지출하였다. 또 12만 원 상당의 논과 밭을 기부하여 이 학교의 재단을 설립, 농촌교육과 농사 개량에 힘썼다. 1934년 개인 재산을 기부하여 신천에 교회당을 건립하였다.
1931년 8월 손자 이재균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후 건강이 악화되었고 1934년에 사망하였다. 그녀의 사망 소식은 전국적인 화제가 되었고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거행되었다. 1934년 6월 23일 신천공설운동장에서 거행된 영결식장에 2만 명이 참석하였다. 왕재덕이 종교의 영향 속에서 육영사업과 사회사업을 한 것은 분명한데, 종교가 기독교인지 천주교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왕재덕의 농민 교육사업은 사위 안명근의 이상촌 건설운동과 연계하에서 이루어졌다.